33 현대불문헌

서로박: 미셀 우엘벡을 끊을 수 있는 이유 (2)

필자 (匹子) 2019. 5. 5. 12:27

7. 미셀 우엘벡은 인종주의자, 여성 혐오자, 반동주의자, 이슬람 적대자인가? 많은 독자들은 미셀 우엘벡의 문학 작품을 읽고, 작가의 태도에 열광하거나, 비난했습니다. 그만큼 우엘벡 문학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로 분명하게 나누어집니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작가가 인종주의, 여성 혐오, 반동주의, 이슬람 적대자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비판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비난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자신이 백인종 남성으로 유럽 사회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신의 근원적 뿌리를 거역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극렬한 인종주의 내지 여성 혐오를 표방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했습니다. 미셀은 정치적 반동주의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미셀 우엘벡 자신은 정치적으로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일종의 회의적 불가지론자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8. (이슬람) 종교에 관한 미셀 우엘벡의 견해: 언젠가 미셀은 “가장 어리석은 종교는 이슬람이다.”라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파리의 이슬람 단체, 프랑스 반-인종연합 그리고 프랑스의 인권 단체는 미셀 우엘벡을 법적으로 고발한 바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 “모든 인간은 종교를 비판할 수 있다.”라는 프랑스의 기본권을 근거로 미셀 우엘벡에 대한 고발 조처는 취하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엘벡은 『꾸란Koran』을 읽은 뒤부터 이슬람 사상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 무지를 떨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꾸란』을 읽은 분들은 이슬람 사상이 극단적 폭력을 추구하는 지하드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리라는 것입니다. 우엘벡은 유대주의 가운데 라엘 사상과 그 종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2003년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라엘 종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대부분 종교가 금욕을 추구하는 데 비해 라엘 종파는 쾌락을 추구하며, DNA 복제로 인한 클론의 탄생을 열광적으로 찬양합니다. 묵시록의 시점에 종교는 과학으로 대체된다고 확신하는 그룹이 라엘 종파입니다.

 

9. 『소립자』의 두 주인공 브뤼노와 미셀: 작품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셀과 브뤼노는 50년대 말에 프랑스의 어느 지역에서 태어난 이부동복의 형제입니다. 어머니, 제닌스는 성 중독증 환자였습니다. 남자와의 섹스에 전력투구하다보니, 자식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셀과 브뤼노는 제각기 다른 조부모에 의해서 양육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모로부터 자연스러운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청년기를 보낸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의 안식처로서의 빈 공간을 알지 못합니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정원의 깊숙한 곳, 다락방, 인디언 텐트 등과 같은 안온함을 가져다주는 휴식처를 찾곤 합니다. 이는 심리적 퇴행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뒷걸음질과 같습니다. 브뤼노는 나중에 교사가 되는데, 평생 성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여자들과 격정적으로 성교하지만,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감정 또한 생겨날 리 만무합니다. 충족되지 않은 성욕 그리고 이로 인한 심리적 허망함은 그를 더욱더 쾌락의 늪에 빠져들게 합니다. 미셀은 고분자 물리학을 전공하여 물리학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고, 여성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10. 불혹의 나이에 사랑을 알다: 미셀과 브뤼노는 제각기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브뤼노는 크리스티안이라는 여성을 사귀게 됩니다. 크리스티안은 과도한 성욕을 지닌 여자였는데, 자신의 몸매를 바라보는 남자들과 살을 섞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미는 끝없이 남자를 갈아치우면서 살아온 터라, 애틋한 사랑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브뤼노는 지금까지 만난 성 도락을 즐기는 진상들과는 다른 사내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오르가슴에 이르는 순간 그들은 내적으로 타오르는 연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다리가 괴사되는 질병을 얻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적 쾌락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마약을 남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소설 속에서 명징하게 서술되지는 않습니다. 썩어문드러지는 사지의 아픔을 참기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결국 크리스티안은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브뤼노는 사랑하는 여인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아 이성을 잃고 맙니다. 그의 심정은 정서적으로 찢겨져 나갔던 것입니다. 브뤼노는 이로 인하여 정신 병원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11. 새로운 인간의 가능한 삶: 다른 한편 미셀은 학창 시절에 잠시 사귀던 아나벨과 우연히 조우합니다. 아나벨의 눈빛은 은밀하고 애틋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미셀 역시 마흔의 나이에 비로소 한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벨 역시 자궁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치료 받다가 더 이상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미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미셀은 더 이상 사랑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시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확립합니다. 

 

새로운 인간은 일종의 클론으로서 종래의 인간과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많은 클론으로 분화될 수 있기 때문에 개별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인간에게 나이와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 우엘벡이 갈망하는 어떤 새로운 인간의 가능한 삶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12.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헤테로피아: 미셀 우엘벡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새로운 인간의 몸,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작가들이 주로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이상적 (혹은 끔찍한) 모델을 설계했다면, 우엘벡은 이러한 사회적 구도 대신에 마치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속에 어떤 해결책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영역과 같습니다. 새로운 인간의 몸은 미셀 푸코가 언급한 유토피아와는 다른 종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령 푸코는 사회가 강요하는 지배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4)에서 제레미 벤탐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일종의 원형감옥)을 구체적 예로 들면서, 청년 수련원, 양로원, 요양원, 감옥, 정신병동, 군대의 막사, 묘지, 영화관, 극장, 정원, 박물관, 도서관, 축제로 활용되는 들판, 숙박시설, 홍등가, 여객선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할 때 새로운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3차원의 공간에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3차원의 공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이러한 3차원의 공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성 생활을 통해서 이어져 나가려고 하는 종족 보존의 욕구는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13. 유토피아의 공간으로서의 몸, 혹은 소립자: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철학자 파스칼이 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르가슴은 습관의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실 성적 오르가슴은 인간이 습관적으로 갈구하는 오르가슴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적 파트너를 찾아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인간의 성적 차이는 인간의 성적 갈망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에게는 성적 차이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요약되는 요철 (凹凸)의 결합이 없이 성적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면, 이는 인간 삶을 이별과 고통, 불행과 슬픔을 떨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브리엘 푸아니Gabrielle Foigny는 자신의 소설 『남쪽대륙 알려지다La Terre Australe connue』(1676)에서 양성구유의 유토피아를 설계한 바 있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몸속에 소립자, 다시 말해서 크라우체 소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짝짓기 없이 크라우체 소체의 작용으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황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14.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간의 쾌락으로써 젊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 만약 인간이 신과 같이 죽지 않고 스스로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이는 과연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될까요? 과학 기술의 개발로 인하여 불사의 존재 내지 소립자를 활용하여 쾌감을 얻는 존재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다면, 이는 과연 바람직할까요? 이에 관해서 우엘벡은 아무런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엘벡의 문학의 가치는 이러한 물음으로써 종결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은 대체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갈망 그리고 이로 인한 욕망의 해소 등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전쟁에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서,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우엘벡 역시 사이언스 픽션의 기상천외한 상상에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가미시켰을 뿐입니다. 인간의 쾌락을 농락당하는 이야기를 읽느니, 차라리 쥘 베른의 소설, "해저 이만리"를 읽는 게 나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