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0전독문헌

서로박: 포이히트방거의 유대인 전쟁 (3)

필자 (匹子) 2018. 8. 2. 09:48

10. 요제프, 보편적 우주론으로서의 유대주의에 경도하다. 유대주의의 박사, 가마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당분간 유대주의가 민족주의적으로 편협하게 활용되는 것을 좋게 생각하네. 이는 유대주의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말일세.” 요제프는 유다에서 자신의 오랜 학문적 경쟁자인 유스투스 티베리아스를 만납니다. 기원후 79년경에 주인공은 유스투스와 함께 로마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티투스 황제가 임종 직전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티투스 황제가 죽으면, 그의 뒤를 이을 심산이었습니다.

 

요제프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유대인 성당을 건립합니다. 그는 다시 마라를 찾아서 그미와 화해합니다. 뒤이어 요제프는 오로지 창작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살아갑니다. 장년의 나이가 훌쩍 넘자 요제프는 기독교 문화보다는 유대 문화에 더욱 가까워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구의 뿌리가 보편적 우주론에 근거한 유대주의 사상이라는 것을 서서히 확신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기독교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기원후 81년에 티투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주인공은 티투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어쩔 수 없이 야훼 신을 경배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로마 사람들을 높은 위치로 격상시키게 했고, 유대인들을 영원히 깔아뭉개도록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입니다.

 

11. 주인공 요제프의 연구: 제 3권, 『그날은 온다』는 요제프의 연구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로마에 칩거하면서 『유대인 민족의 우주론적 역사』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요제프는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를 먹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다 지역에서는 다시금 유대인들의 폭동이 발발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도미티아누스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성명서를 로마에서의 전쟁 불안을 가라앉히고, 인종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독재자 도미티아누스로부터 핍박당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와중에 요제프가 왕궁의 술수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제프는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황제를 모독하게 됩니다. 그는 세계시민 사상의 이상을 피력하고, 자신의 책 『아피아누스, 혹은 유대인의 오래된 문화에 관해서』에서 유대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첨부했던 것입니다. 당국은 이 점을 로마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주인공에게 음으로 양으로 제약을 가합니다.

 

12. 아들의 처형과 마지막 전투: 요제프는 자신의 연구로 인하여 끔찍한 수모를 감수해야 합니다. 결국 로마 당국은 요제프를 문초하여, 요제프의 셋째 아들, 마티아스를 처형시킵니다. 특히 마티아스는 야권 세력에 가담한 왕비 루시아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제프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면서 자신의 아들의 시체와 함께 유다 지방으로 돌아옵니다. 이 무렵 요제프는 심신이 초췌하여 그야말로 늙은 몰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은 더 이상 학문과 집필에 몰두할 수 없을 정도의 각오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로마 제국에 복수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성적인 판단 대신에 혁명적 열정을 키우면서, 재야 세력에 가담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유다 지방에서 형성된 유대인 폭동에 전적으로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로 진격할 때 요제프는 로마의 수비대의 급습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가 추구하던 세계 시민으로서의 이상 그리고 동쪽 서쪽 문화를 서로 화해시키고 연결시키려던 주인공의 시도는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갑니다. 요제프는 죽은 뒤에 어떠한 제자도 거느리지 않게 됩니다.

 

13. 작품에 반영하려고 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 포이히트방거는 이 소설에서 유대주의의 환영을 집요하게 추적해나갔습니다. 이는 두 가지 사항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요제프라는 인물을 통해서 유대인 작가 자신의 해외 망명의 경험을 성찰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주인공의 활동을 통해서 유대주의의 상 속에 숨어 있는 선민의식 내지 자기애적인 선동 선전을 차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유대인 전쟁』은 20세기 유럽에서의 제반 인종 갈등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포이히트방거는 자신의 소설이 작가 자신의 개인적 사적인 입장을 드러낼까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러한 테마를 동시대의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표현하려고 한다면, 행여나 반유대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이 나의 소설적 표현을 방해할까 두렵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책에 담긴 신앙과 결속감을 느끼면서, 추방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세계 시민의 이상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시민의 조건은 지속적으로 유대인의 고유한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14.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려는 유대인의 노력: 모순된 삶: 요제프는 유대주의를 로마의 문화와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문화를 포기하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는 다만 유대인으로서 로마에서 인정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문화적 근원을 동일한 가치로 인정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에 그는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던 것입니다. 요제프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제반 국가의 운명을 형성시키는 것이 사상이고, 종교적 이념이며, 정신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제프는 이상주의자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요제프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으로서의 학문적 정치적 참여는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에 대한 굴복을 통해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주인공은 그의 자식들의 처형, 가족 체제의 붕괴 등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포이히트방거는 주인공 요제프처럼 세계 시민으로서의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시대를 훨씬 앞서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가, 포이히트방거는 미래에는 유대인이 핍박당하지 않고 훨씬 더 나은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희망을 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