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중세 문헌

키케로의 국가론 (1)

필자 (匹子) 2021. 8. 17. 09:39

1. 귀족의 사고에 근거한 혼합정체이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BC. 106 – BC. 43)의 『국가론 De re publica』(BC 54 - 51)은 플라톤의 『국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계승한 국가 이론의 서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키케로가 세 가지 정치 형태인 군주제, 과두제 그리고 민주제의 장단점을 지적하고, 하나의 절충적 견해를 도출해낸다는 사실입니다. 키케로는 이성과 도덕을 중시하는 자세에서 자연법의 이상을 중시했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의 상류층, 다시 말해 귀족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법과 세계를 대하는 그의 시각은 귀족의 인품과 도덕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김용민: 22). 비록 그가 공화주의에서 정치적 이상을 발견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처한 고대적 수직구도의 계층적 세계관을 직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영식: 361). 그밖에 키케로의 문헌 가운데 여섯 번째 권에 속해 있는 「스키피오의 꿈Somnium Scipionis」은 주제와는 별개로 고대 사회의 우주론에 관한 구체적인 범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범례를 통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출현할 때까지 천문학, 음악 그리고 지리학의 영역에서 유효했던 천구의 화음에 관한 기본적 세계관을 접할 수 있습니다.

 

2. 키케로의 문헌, 일부가 후세에 전해지다: 『국가론』은 『연설자에 관하여De oratore』 그리고 『법 이론De legibus』와 마찬가지로 키케로가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난 시기에 구상되었습니다. 원래 『국가론』은 여섯 권으로 기술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약 두 권 반 정도의 문헌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래 키케로의 이 문헌은 오랫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819년 이탈리아의 문헌학자 안젤로 마이Angelo Mai는 우연한 기회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기원전에 만들어진 양피지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서의 「시편」 119 이하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양피지의 배후에 놀랍게도 키케로의 『국가론』의 제 1권, 제 2권 그리고 제 3권의 일부가 흐릿하게 기술되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양피지들은 보비오 사원에서 바티칸으로 이전된 것들이었는데, 이른바 재활용 양피지에 해당하는 “이중으로 기록된 양피지Palimpsest”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양의 모피가 무척 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한 번 작성한 양피지의 원본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른 내용을 덮어쓰곤 하였던 것입니다. (키케로 2007: 27).

 

만약 이중으로 기록된 양피지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일부의 『국가론』조차도 접할 수 없을 테고, 아우구스티누스, 락탄티우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의 문헌을 통해서 책 내용의 일부 문장만을 접했을 것입니다. 『국가론』의 말미에 수록되었던 「스키피오의 꿈」은 기원후 4세기경에 별도의 판본으로 세상에 공개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철학자이자 문법학자인 암브로시우스 Th. 마크로비우스Ambrosius Th. Macrobius가 키케로의 글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하여 간행했기 때문입니다.

 

3. 키케로의 삶 (1): 키케로는 로마의 공화정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변화되는 전환기에 살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역정 그리고 비극적 죽음은 어떻게 해서든 공화정의 체제가 지켜져야 한다는 신념에 기인합니다. 키케로는 BC 106년에 로마 남부 아르피눔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환경 덕분에 키케로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습니다. BC 88년에 키케로는 플라톤주의자, 라리사 출신의 필론 (Philon, BC. 159 – 84)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필론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필론과는 동명이인입니다.) 필론은 내란을 피해 로마로 온 아카데미 학원의 수장이었습니다. 이듬해에 필론이 사망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필론이 이끌던 아카데미 학파의 비판적 사유의 방식은 키케로에게 평생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케로는 BC 63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습니다. 기원전 58년에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비밀 협약을 통하여 삼두체제를 가동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키케로의 정치적 입지는 서서히 흔들립니다. 세 유력자의 배후 조종으로 호민관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니라 클로디우스였습니다. 키케로는 집정관 시절에 카탈리나 반란 사건의 주동자를 색출하여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는데, 클로디우스는 이를 문제 삼아서 키케로를 로마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래서 키케로는 테살로니카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키케로의 중요한 문헌은 바로 테살로니카의 망명 시절에 집필되었습니다.

 

4. 키케로의 삶 (2): 기원전 57년에 키케로는 복권되어 다시 로마로 되돌아옵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보고 두 사람이 화해하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폼페이우스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당합니다. 이로 인하여 내란이 종식되고 카이사르의 천하가 시작됩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돕지 않고,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습니다.

 

BC 44년에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키케로는 원로원 사람들과 함께 끔찍한 암살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로마가 다시 공화제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권력 공백으로 로마에서는 혼란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미 60대였던 키케로는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에 이르는 막강한 정치가들이 차례로 죽어나간 상황에서, 이제 남은 유일한 정치가는 키케로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당선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는 공화제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안토니우스가 견제의 대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기대를 저버리고, BC 43년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새로운 삼두정치의 시작을 알립니다. 키케로는 이러한 삼두 정치의 희생양이 됩니다. 결국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군인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5. 『국가론』의 구성과 틀: 키케로가 문헌 전체에서 무엇을 구상하려고 했는가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키케로는 『국가론』에서 자신의 동생인 귄투스에게 어떤 유명한 대화에 관해 보고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대화 방식으로 『국가론』을 집필했는데, 중요한 등장인물은 로마가 탄생시킨 불세출의 영웅이자, 담대한 지성의 소유자인 “두 번째 스키피오”입니다.

 

두 번째 스키피오는 실제로 기원전 129년에 자신의 정원에서 3일 간에 걸쳐 진행된 라틴 축제를 개최했는데, 이 축제를 계기로 친구들과 심도 넘치는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국가론』은 바로 이 내화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키케로의 문헌은 쉽게 말하자면, 제 1권, 제 3권 그리고 제 5권의 서문을 제외한다면, 3일간 지속된 대화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스키피오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스키피오 서클에 가담한 두 번째 스키피오의 친구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