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399) (여)성 억압의 한국 사회

필자 (匹子) 2018. 4. 21. 09:51

 

요즈음 전개되는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여성만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 성 자체를 억압하는 나라이며, 유교적 질서의 가부장주의의 풍습이 온존하는 나라다. 그렇기에 배비장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별반 다르지 않다. 서양인들은 꺼림칙하지만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편이지만, 동양 사람들은 하반신의 이야기를 무조건 "쉬쉬"하고 함구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성생활은 무한대로 용납되는 반면에, 여성에게는 언제나 조신함만이 강요되어 왔다.

 

불교의 문화는 유교주의에 비해서 강력하지는 않지만, 금욕을 겉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부디 불교의 고결한 수도의 삶 그리고 기독교의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노력 등을 폄하할 뜻은 없으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승려들의 금욕은 수도 생활의 전제 조건으로 이해되어 왔다. (성적) 욕망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비구니든 스님이든 간에 처음부터 수도 생활을 영위할 기초적 조건을 채우지 못한다. 욕망이 없는 자에게는 처음부터 유혹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수련의 연습이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독일의 성과학자 막스 호단 Max Hod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럽은 기독교 문화로 인하여 성적 욕망과 에로틱의 쾌락을 상실했다 Europa hat durch das Christentum die Kultur und Lust an der Erotik eingebüßt."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동양의 불교, 유교의 문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과거에는 종교의 영향이 엄청나게 컸다. 종교의 본질은 영생을 추구하는 노력에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매도되고 비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성과 성행위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하는 금기 사항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로써 결혼 내의 정사만이 합법적이고, "혼외 정사는 불법"이라는 시민 사회의 관습이 종교적 계명과 접목되어 계속 이어져 왔다.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과 병행하여 성의 두 가지 기능이 철저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자식과 종족을 잇는 수단으로서의 성이며, 다른 하나는 쾌락 내지 에로스를 향유하기 위한 성이다. 18세기의 칸트 역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라. 종족 번식과 쾌락의 욕구는 공교롭게도 같은 몸에서 출현하고 해결되곤 한다. 이것이 인류를 그렇게 오랫동안 혼란에 빠뜨렸던 단순한 사실이기도 하다. 1930년대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Alexandra Kollontai는 인간의 성 생활을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혼내 정사이고, 두 번째는 매춘이며, 세 번째는 자유 연애였다. 그미는 이 가운데 세 번째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로써 혼내 정사와 혼외정사 사이에는 -적어도 소련 그리고 동구권에서는-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차이가 온존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서구에서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결혼 제도가 조금 강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혼외정사는 아직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용납되지 않고 있다. 사실 남한에서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불과 몇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아가 자유연애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과 서양 사람들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한국인들은 서양인과는 달리 자유연애를 결혼하기 전의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젊은이들은 결혼 제도를 사랑의 최종점으로 못박고 그 전에 잠시 사람을 사귀는, 다시 말해서 "썸 타는" 단계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특히 한국의 처녀들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전통적으로 혼전 순결을 부모로부터 강요받기 때문에 사랑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난다. 그들의 몸은 이른바 오겹살 속에 갇혀 있다. 1. 혼전 순결이라는 이데올로기, 2.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 3. 성병과 에이즈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그리고 4. 여기에 첨부되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성적 경험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버림받게 된다는 불안 (헤스터 콤플렉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더욱더 성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든다. 5.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가난을 떨치는 노력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성의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에 관한 물음이 세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문제"임을 깨닫는 일이다. 주위 사람들은 내심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타자의 사랑을 방해한다. 우리가 타자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이를 질타하는 까닭은 우리의 내면에 도사린 성에 대한 불만 그리고 질투심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히스테리가 출현하는 궁극적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어진 공동체의 계율, 특히 종교 단체가 어떠한 이유에서 개개인의 사랑의 열망을 차단시키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일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은 여전히 유감스럽게도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아직도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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