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370) 성 단상 (9)

필자 (匹子) 2017. 7. 1. 10:58

81: 생태 공동체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일부일처제의 가족 구도를 허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다원주의의 시각에서 상대적인 체제로 수용하도록 바꾸어놓게 될 것이다. 미래에 살아갈 호모 아만스는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파기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속에 거의 정례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가부장주의의 가족 구도를 어느 정도 상대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82: 통일이 무조건 좋고, 분리 독립이 무조건 나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구체적 현실적 정황이 통합과 분리를 결정하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혼이 무조건 기뻐해야 할 일이고, 이혼이 슬퍼해야 할 일은 결코 아니다.

 

83: 서구에서의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형성되는 공동의 삶이다. 그러나 동양 (특히 타이완 그리고 남한)에서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만남으로 형성되는 공동의 삶이다. 그렇기에 동양 사람들은 결혼 시 부수적인 문제 (혼수 등)로 골머리를 앓지만, 이혼 시 심적 고통, 상대방에 대한 질투심, 자신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불행에 대한 방어적 자세로 인하여 상대방 가족들에게 심리적으로 온갖 상처를 가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헤어진다.

 

84: 헤어지면 남이라는 생각은 이혼하는 남녀들로 하여금 상대방에 대한 도의를 지키지 않게 만든다. 이별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수모와 고통을 되갚아주기 위해서 때로는 상대방에게 온갖 치욕을 안겨주곤 한다.

 

85: 서양에서 싱글들이 다시 임을 만나 사랑을 나눌 경우, 그 (혹은 그미)는 자신의 과거에 겪었던 슬픈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는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부분의 경우 이를 경청하면서, 상처를 씻어주겠노라고 임을 위로한다. 그런데 남한에서 남녀가 만나서 재결합할 때 특히 여성은 과거의 연애경험을 시시콜콜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남성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의처증을 지닌 몇몇 남성들은 임의 과거사를 기억하고 질투와 노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86: 일부일처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옳은 말씀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현실적 정황을 고려할 때 가난을 해결하는 문제 그리고 학교와 병원을 둘러싼 사회보장의 시스템에 관한 논의와 실천이 우선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87: 일부다처제는 대체로 특권층의 남자들이 행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왕이 여러 명의 왕비를 거느려도 아무도 이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코카서스의 자드루가 공동체는 세금 징수의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남자가 사랑하는 임들에게 정조를 강요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88: 인간 동물을 남성, 여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서로 이질적이라고 해명하는 일은 전근대적이다. 호모 아만스는 생식기관 그리고 근육 량에 있어서 서로 다를 뿐, 종으로서 상호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인 대 개인 사이의 차이가 어느 정도 주어져 있을 뿐이다. 성을 이원론으로 구분하는 것은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에 의하면 터무니없는 선입견이다. 왜냐하면 호모 아만스는 개별적으로 서로 조금씩 다르며, 제각기 어느 정도 다른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89: 일부 사람들은 일부다처제의 관습을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하곤 한다. 그 논거로서 사람들은 다음의 사항을 열거하곤 한다. 이른바 간통한 남자는 아내에게만 죄를 짓지만, 간통한 여자는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조시대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진부한 사고이다. 왜냐하면 첨단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 자식 낳기는 얼마든지 인위적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씨받이 존재로 매도하는 태도는 극악한 팔루스 중심주의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90: 프랑스 작가,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생물학적 차이 외에 다른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간통죄가 폐지되고, 첨단 자연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대에 성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태도는 그 자체 시대착오적이다. 어쩌면 트랜스젠더 그리고 동성연애자들도 새로운 평등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