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종교가 각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내세의 영생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현세의 금욕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영생은 인간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마지막 꿈이다. 이에 비하면 인간 동물은 현세에서 수미일관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어쩌면 신앙의 생활 방식은 처음부터 사랑의 삶과 엇박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크게 작용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발전된 과학 기술은 과거의 종교적 세계관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도록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믿음 내지 신앙의 가치마저 부인될 수 있을까? 경박한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몸이 산소와 수소 그리고 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경박한 무신론자들보다 경건한 신앙인들의 말과 행동에 더 많은 신뢰감을 느낀다. 적어도 그들은 인간적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의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채 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특히 민초들이 느끼는 사랑과 성의 행복 내지 구원받은 축복의 삶은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층 차이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약자와 무지렁이들은 영생을 설파하는 사제들의 농간에 언제나 이용당하면서, 마치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처럼 현세에서 힘들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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