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에리히 프리트

필자 (匹子) 2021. 5. 4.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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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리트 (1921 - 1988) - 그는 적의 언어로써 촌철살인의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에리히 프리트는 1921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외동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운송업자였으며, 어머니는 삽화가였습니다. 프리트는 다섯 살부터 빈에 있는 아동 극단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부터 김나지움에 다녔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다음에 19385월에 프리트의 아버지는 게슈타포의 취조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BBC 방송국. 프리트는 1968년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프리트는 그때 벨기에를 거쳐서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런던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망명을 선택한 젊은이들을 돕는데 앞장섰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프리트는 도서관 사서, 우유 관리사 그리고 공장 노동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여러 잡지를 창간하여 일했습니다.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영국 BBC 방송국에서 정치적 논평자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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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오스트리아는 1939년부터 1947년 사이에 결성된 오스트리아 젊은이 모입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진보적 성향의 정치관을 지닌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에리히 프리트는 런던에서 자유 독일 문화연맹 그리고 젊은 오스트리아 Young Austria단체에 가담하였습니다. 나중에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도 가입하였습니다. 이는 프리트의 정치적 신념과 관계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프리트는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무척 실망하여, 1943년에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서 탈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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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그는 마리아 마르부르크 Maria Marburg라는 여성과 결혼하였고, 아들 한스가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에 그의 첫 번째 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특히 반파시즘 시인들의 시작품을 수록한 앤솔로지도 간행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펜클럽이 주도하는 망명 출판사 Exilverlag의 도움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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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올바른 게 아닌데... '당신은 이제 아내를 먹어도 됩니다.' 이건 마찬가지로..." 엥? ㅋㅋㅋ 일반 사람들은 세 번씩 결혼하는 것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곤 한다.

 

1946년 프리트는 마리아 마르부르크와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법적으로 그미와의 이혼은 1952년에야 가능했습니다. 1952년에 프리트는 난 스펜스-아이히너 Nan Spence-Eichner라는 여성과 재혼하였습니다. 그미와의 결혼을 통해서 아들 그리고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결혼생활은 10년간 지속되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1965년에 이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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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에리히 프리트이며, 오른쪽이 그의 세 번째 부인 캐서린 보스웰이다. 시인은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자그마하다. ㅎㅎㅎ

 

프리트는 1962년에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빈으로 돌아갑니다. 1965년 여름에 프리트는 캐서린 보스웰 Catherine Boswell 이라는 여성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딸과 쌍둥이 아들이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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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C 라이트 밀즈는 "들어라 양키들아."를 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쿠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는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바나의 철학 전공자 피델 카스트로는 친미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젊은 그룹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혁명가들을 소탕하려는 정부군의 무전기를 납치하여 , 미국으로부터의 모든 보급 물자를 차지하게 됩니다. 드디어 60년대 초에 쿠바는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의존을 떨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때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싸우던 혁명가 가운데에는 체 게바라가 있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더 많은 월남을! 하고 외치면서 남아메리카로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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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트의 시집 그리고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전선 Front이 없었다. 북쪽에는 호지민이 다스리고 있었고, 남쪽에는 고 딘 디엠이 다스리고 있었다. 문제는 남부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 인민해방전선이라는 게릴라 단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지하 벙크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외국 군인들을 사살하곤 하였다. 사진을 보라. 남 베트남 지역에 둥글게 그려진 원의 지역들이 눈에 띈다. 이곳이 바로 베트남 지역의 격전지였다. 미국은 엄청난 경비를 소비하면서 전쟁을 치렀지만, 나중에 그 지역을 떠나야 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맹호부대 청룡부대 군인들 역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독립 (인민 해방) 전쟁에 참가하여 피 터지게 고생하고, 훗날에 고엽제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리트는 1968BBC 방송국의 일을 완전히 청산하고, 정치적 신념을 지닌 시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많은 정치시를 발표하였으며, 낭독 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시는 68 학생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시집 그리고 베트남 그리고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을 예리한 정치시를 쓰는 에리히 프리트는 무척 껄끄러운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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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학생운동의 장면들

 

 

그는 한편으로는 저명한 시인과 작가의 명성을 누리면서 1977년 기센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치적으로 첨예한 견해를 드러내면서 저널리스트 그리고 정치가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프리트는 자신의 정치적 발언으로 인하여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베를린 경찰청장 클라우스 휘브너는 그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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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라우흐 (1947 - 1971)는 사회주의 독일 대학 동맹에 속하던 학생이었는데, 학생 운동 당시에 도시 게릴라로 활동하였다. 그는 미 제국주의 반대, 베트남 참전 반대 등을 외쳤다. 결국 그는 경찰과의 대치 끝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1972년 경찰은 게오르크 폰 라우흐 Georg von Rauch를 사살한 바 있습니다. 그해 27일에 프리트는 슈피겔지에 편지를 발표하여, 경찰의 가혹한 대응을 데모를 예방하기 위한 살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재판은 함부르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동료 작가, 프리트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프리트는 1974124일 자유의 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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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학생운동이 끝나고난 다음에 사람들은 과거의 열정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정의와 단결에 집착하지 않고, 사회에 순응하여 과거의 지조를 접은 채 일반 회사에 취업하여 일상인이 되었습니다. 몇몇 사람만이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이를 관철하려고 했으나, 사회적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바더 마인호프 그룹에 가담하여 결국 적군단 RAF을 결성하여 테러를 저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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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무니 없는 거야/ 하고 이성이 말한다/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사랑이 말한다/ 불행 그 자체/ 하고 계산이 말한다/ 오직 고통이야/ 하고 두려움이 말한다/ 전망이 없어/ 하고 견해가 말한다/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사랑이 말한다/ 웃기는 거야/ 하고 자만이 말한다/ 결백할 뿐이야/하고 신중함이 말한다/ 불가능하자/ 하고 경험이 말한다/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사랑이 말한다.  

 

 

1979년 프리트는 시집 연애 시 Liebesgedichte를 발표합니다. 이 책은 상당히 많이 팔렸습니다. 이 시집에는 사랑에 관한 프리트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는데, 많은 독자들이 정갈하고 간결한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 오스트리아는 프리트에게 오스트리아 국적을 부여했습니다. 시인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1949년부터 지니고 있던 영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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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트의 연애시 한 편 너를 Dich:

"가까이 있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게/ 멀리 있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게/

곁에 있을 때 너를 생각할게/ 네가 정말 거기 있기 때문에

Dich nicht näher denken/ und dich nicht weiter denken/

dich denken wo du bist/ weil du dort wirklich bist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젊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고

Dich nicht älter denken/ und dich nicht jünger denken/

nicht größer nicht kleiner/ nicht hitziger und nicht kälter 

널 생각하고 그리워하지 않을게/ 네가 보고 싶다 말하지 않을게/

그냥 너를 사랑할게/ 실제로 네가 있는 곳에서

Dich denken und mich nach dir sehnen/ dich sehen wollen/

und dich liebhaben/ so wie du wirklich bist "

 

 

  

오나치, 미하엘 퀴넨 (1955 - 1991)을 가리킵니다.

  

1984년 프리트는 감옥에 갇혀 있던 나오나치의 당원, 국민사회주의 행동 전선의 지도자인 미하엘 퀴넨 Michael Kühnen을 자발적으로 면회했습니다. 프리트에 의하면 마하엘 퀴넨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놀라운 토론의 대상자이며, 상당히 배울만한 견해를 지닌 사람이라고 논평했습니다.

 

 

 

1981년 평화를 위한 작가 회의에 참석한 에리히 프리트 (맨 오른쪽). 왼쪽부터 프란츠 퓌만, 알프레트 벨름, 폴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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