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1)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필자 (匹子) 2023. 1. 19. 10:36

1. 캄파넬라와 『태양의 나라』: 토마소 캄파넬라 (Tommaso Campanella, 1568 - 1639)의 『태양의 나라La citta del sole』 (1602)는 질서 유토피아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작품 속에 사유재산제도의 철폐, 가족제도의 철폐 등이 설계되어 있으나, 모든 삶이 마치 사원에서의 생활처럼 점성술의 원칙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영위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초안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어로 구상되었습니다. 『태양의 나라』는 1602년에 집필되기 시작했으나, 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623년에 비로소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1612년 겨울 독일의 인문학자 토비아스 아다미는 제자와 함께 그리스 예루살렘 그리고 몰타를 여행한 다음에 나폴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나폴리의 감옥에 토마소 캄파넬라가 수감된 사실을 접하고 그를 면회하였습니다. 

 

아다미가 간수에게 뇌물을 주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는지는 몰라도 캄파넬라와의 면회는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캄파넬라는 우연한 방문객에게 이탈리아어로 집필된 시편들과 라틴어 원고들을 몰래 전해주었습니다. 따라서 『태양의 나라』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아다미의 숨은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Flasch: 9). 이 문헌에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나라. 신께서 성 카타리나와 브리기다에게 약속한 바 있는 기독교 국가의 혁신에 관한 이념이 기술되어 있는 문헌.”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다미가 어째서 원고를 거의 10년 동안 묵혀두었다가 1623년에 공개했는가? 에 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당시는 30년 전쟁으로 유럽 전역이 종교 갈등으로 황폐화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출판의 어려움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2. 놀라운 학문적 재능을 지닌 청년 수도사: 토마소 캄파넬라는 1568년 칼라브리엔의 마을에서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무언가 배우기 위하여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을 자아 인식의 과정에서의 고통으로 이해한 도마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만큼 도마 복음은 현대인의 신앙생활에 큰 지침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김용욕: 제 1권: 220). 

 

캄파넬라는 당시에 사상의 혁명적 전사로 알려진 텔레시오 (Telesio, 1509 - 1588)의 문헌, 『자연 존재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 깊이 매혹당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콜라 학문의 영향을 배제한 채 고대의 자연철학을 다시 수용하려는 텔레시오의 학문적 의향을 대폭 수용하려 했습니다. 캄파넬라는 1588년 가을에 텔레시오를 찾아가서 직접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는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왜냐하면 텔레시오는 1588년 10월에 콘스탄사에서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캄파넬라는 계속 연구하여 『감각에 의해 증명된 철학Philosophia sensibus demonstrata』(1589)를 집필하여 텔레시오의 사상적 타당성을 증명해냅니다.

 

3. 캄파넬라에게 가해진 냉대와 핍박: 당시 대부분의 대학은 전통적으로 스콜라 학문을 중시하였고, 새로운 학문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캄파넬라는 학문적 좌절과 핍박의 고행 길을 어렵사리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고대 철학 가운데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이로써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요, 수도원 사람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고대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마저 무시당했으며, 텔레시오의 광학을 좌시하였습니다. 캄파넬라는 이러한 교단의 편협성을 납득할 수 없었으며, 선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캄파넬라의 이러한 저항적 태도로 인하여 수도원 사람들은 그를 이단아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1589년 캄파넬라는 교단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나폴리로 떠납니다. 

 

얼마의 시기동안 가정교사 일을 전전하다가, 뜻있는 학자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심지어 1593년 갈릴레이를 찾아가 그와 면담합니다. 그러나 갈릴레이 역시 호구지책으로 수학을 가르치면서, 연명하고 있었으므로, 젊은 수도사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고난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속국이었고,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은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식민 상태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서 모반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1599년 캄파넬라는 정치 세력에 연루되어 그해 9월 6일에 감옥에 수감됩니다.

 

4. 고통스러운 고문이라도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망치게 하지는 못한다.: 1600년의 유럽의 정치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혹독했습니다. 1600년에 2월 17일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단의 혐의로 로마에서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캄파넬라는 나폴리의 감옥에서 일곱 번이나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가령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로 인하여 캄파넬라의 어깨에 살점 타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고문은 무려 40시간 지속되었는데, 이때 쏟은 피는 감옥의 코너에 설치된 물통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Schölderle: 69).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캄파넬라는 매 시간 혼절했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습니다. 어느 날 자살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결국 캄파넬라는 1600년 1월 18일에 이단과 반역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어느 의사가 그에게 정신 착란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캄파넬라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종신형으로 전환됩니다.

 

“만민법ius gentium”에는 “정신 착란자는 이단자로 처형되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캄파넬라는 왜 감옥에 불을 질렀을까요? 처형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고문의 고통을 참지 못해서였을까요? 어쨌든 캄파넬라가 풀려난 해는 1626년이었습니다. 나이 31세의 나이에 수감되어, 58세의 나이에 석방되었으니, 무려 27년 동안 옥살이한 셈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권력은 캄파넬라에게 무시무시한 탄압의 발톱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그의 제자 한 사람이 에스파냐 부왕의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교황 울바노 8세는 비밀리에 출간된 캄파넬라의 천문학 서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에서는 도저히 뜻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캄파넬라는 66세의 나이에 비밀리에 로마를 탈출하여 리브노트 항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망명하게 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캄파넬라의 강의 (독문)를 들을 수 있습니다. (3분 24초) 

https://www.youtube.com/watch?v=w7iMp9ClG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