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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 김종갑의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필자 (匹子) 2012. 4. 28. 14:55

 

 

김종갑 (2004):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건국대 출판부

 

김종갑 교수의 글은 추상적 원론에 치우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몸과 마음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는 내용을 추가로 삽입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책의 논지는 구체적이고 사실에 입각해 있다. 문헌학적 고증 역시 무난하다. 영문학자 답게 자신의 견해 그리고 인용한 견해를 명확히 지적한다는 점에서 무척 진솔하고 놀라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영혼이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교두보라고 믿고 있는데, 김교수는 몸을 하나의 타자로 규정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역학관계를 구명하고 있다. 몸이 타자로 인지된다는 것은 몸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이는 과연 타당한가? 저자의 논지를 접할 때 우리는 돌바크 그리고 라메트리 등과 같은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입장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영혼을 이어주는 사랑과 우정의 감정은 몸의 기능을 고려할 때 관념적 차원에서의 정서일까?

 

책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아무래도 제 4장 "정신분열적 몸"일 것이다. 조현병을 야기하는 정신 분열의 현상은 심리학에서 여전히 감정의 페스트로 알려진 증상인데, 저자는 "주체와 타자, 마음과 몸, 본질과 비본질, 진짜 세계와 가짜세계, 우군과 적군"으로 이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체로 전자를 지키기 위해서 후자를 포기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그 자체 타당하다.

 

물론 리비도가 타자로 향하지 않고, 나르시시즘의 자아에 국한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물론 저지는 부모의 갈등이 조현병을 부추기는 작은 요인이라고 부언설명한다. 그러나 조현병의 발병 요인으로서 오로지 타자로 향하는 리비도의 차단에만 커다란 비중을 두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사실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제 4장의 내용에 대한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약물 치료라든가, 신체 속에서 자연스러운 기의 흐름을 차단시키는 블록을 제거하는 치료 방법에 관해서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저자는 메를로 퐁티의 몸과 타자 사이의 이질성 문제에 관여하여, 몸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몸의 해방은 일부일처제 그리고 사랑의 삶에 있어서의 책임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가능한 것일까? 이는 사회심리학적 차원에서 엄청난 폭발력으로서의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난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