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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토마스 만의 '마의 산' (2)

필자 (匹子) 2017. 12. 29. 09:41

주인공이 마의 산에 머문 지 어느새 7개월이 지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한스 카스트로가 이후의 시기부터 약 7년 동안 마의 산에서 보낸 생활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클라우디아 소샤는 몇 년 후에 그곳을 떠납니다. 세템브리니는 마의 산 아래에 위치한 어느 마을로 이주해버립니다. 주인공의 사촌 역시 의사의 권고대로 요양원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살아가다가, 죽음 직전에 다보스의 요양원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두 사람의 기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회 신자이자 공산주의자인 레오 나프타 Leo Naphta이며, 다른 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커피 재배자인 피터 피퍼코른 Pieter Peeperkorn입니다. 레오 나프타는 실제 인물 게오르크 루카치를 연상시키는 기인입니다. 그는 극단적 시스템을 맹신하는 독단적 테러리스트로서 세계 세템브리니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피터 피퍼코른은 대단한 생명력을 지닌 사내입니다. 그의 행동과 사상은 마치 독일의 극작가 게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면모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클라우디아 소샤는 잠시 요양원을 떠나 있다가 다시 나타나, 피터 피퍼코른에 대해 애정을 느낍니다. 이로 인하여 주인공은 심한 질투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스 카스토르프, 클라우디아 소샤 그리고 피터 피퍼코른 사이에는 사랑의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됩니다.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의 여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피터 피퍼코른의 존재가 요양원의 분위기를 한층 더 밝고 풍요롭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피터 피퍼코른은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성적 무능력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그 역시 “계집에게 사랑의 욕망을 일깨우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 때문에 Aufgrund seiner Ohnmacht, das Weib zur Begierde zu wecken“ 죽음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죽기 전에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사랑과 욕정을 동시에 극복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피퍼코른은 소샤를 여성으로 고찰하는 게 아니라, 선한 인간으로 여기며, 주인공을 자신의 형제라고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피퍼코른이 죽은 뒤에 클라우디아 소샤는 영원히 요양원을 떠납니다. 그 후에 망연자실한 주인공은 멍하니 베르디의 아이다, 카르멘 그리고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고 멍하니 시간을 보냅니다.

 

다른 한편 나프타와 세템브리니는 격렬한 토론을 벌인 뒤에 제각기 상대방에 대한 노여움을 참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권총 결투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자신의 강박 증세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됩니다. 결투의 순간 세템브리니는 허공으로 향하여 총을 갈겨대고, 나프타는 총부리를 자신에게 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결국 소설은 주인공 한스가 외부 현실에 대해 철학적 냉담함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안녕, 한스 카스토르프. 너의 이야기는 끝났다. 우린 그걸 끝까지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지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급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야기 자체 때문에 이야기했을 뿐, 너 때문에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단순한 인물이었으므로.”

 

소설 『마의 산』은 무척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1) 혹자는 "마의 산"을 .1914년 유럽 시민성의 내적 존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G. Lukacs). (2) 혹자는 교양 소설의 전통대로 ?마의 산?을 해석하였습니다. (Weigand, Heller, Scharfschwerdt). 토마스만 역시 후자에 관해 언급했으나, 주인공을 단순한 인물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히틀러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는 익명성의 세계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 반-영웅인 셈입니다.

 

(3) 혹자는 소설의 구조가 신화적 상징 및 문학 작품을 서로 얽혀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철학과의 관련성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Kristiansen, Koopmann, Heftrich, Kurzke u.a.) 그렇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마의 산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가는 방향,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토마스만의 소설은 하나의 분명한 주제로써 우리를 매료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교양소설은 발전할 수 있는 미래의 전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토마스만의 소설은 어떠한 가능성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는 제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개혁하려고 합니다. 더 나은 세계는 나프타의 견해에 의하면 극단적 테러를 통해서 가능하고, 세템브리니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성의 구원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히 토마스만은 나프타보다는 세템브리니에게 더 호감을 느낍니다. 세템브리니는 루시펴 내지는 프로메테우스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사상을 동조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형인 하인리히 만을 몹시 닮았습니다. 그렇지만 토마스만은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견해를 한마디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 Schwätzer”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떠한 변증법적인 지양으로서의 해답을 찾아내지 않습니다.

 

제 6장에서 토마스만은 다보스의 산에서 스키 타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인간은 선 그리고 사랑 때문에 죽음에 대해 어떠한 사고의 권한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후에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어떠한 꿈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는 병든 시민 사회의 허무함을 하나의 죽음으로 이해하지만, 더 이상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시민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병든 시민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탈출구, 이를테면 어떤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도 동경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 충동 때문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