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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베르펠의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별' (2)

필자 (匹子) 2021. 10. 10. 09:49

9. 첨단 자연과학의 활용: 두 사람의 여행은 20세기의 자연과학으로는 도저히 해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거의 십만 년이라는 시공간을 넘나들게 되는 것은 오로지 첨단 자연과학의 활용으로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조차도 텔레파시를 사용하여 먼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소통합니다. 사람들은 약 천 미터 높이의 건축물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높은 건물에서 거주하면서 “회전 비행기 Gyroplane”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이제 그들 대부분은 주로 지하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Zemsauer: 112). 왜냐하면 이곳 사람들은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Jens: 555).

 

그들은 과거의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그들은 더 이상 굳이 지상으로 이주하려 하지 않습니다. 혹성의 표면에는 “중겔 Dschungel”이라고 불리는, 다소 원시적으로 생활하는 종족이 살고 있으며, 지하에는 첨단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천체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불워 리턴의 작품, 『미래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낯선 종족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차피 혹성의 분위기는 단조롭고, 구름 역시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그들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인간 수명은 과거에 비해 세배로 늘어났습니다.

 

10. 평범한 가정, 나체의 생활관습: 주인공이 처음 찾게된 첫 번째 장소는 어떤 평범한 가정입니다. 그 집의 딸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F. W.는 그미의 결혼식에 즈음하여 죽음의 상태로부터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이곳의 누군가가 결혼식의 들러리로 활용할 사람을 위해서 주인공을 마치 “죽음의 정원”에서 빼내어온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은 가족의 구성원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신랑, 신부, 신랑신부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모가 가족들입니다. 신랑은 “이오-도”, 신부는 “아오-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오”는 주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F. W.는 탄생의 충격과 놀라운 삶의 변화에 나른함을 느끼지만, 그들의 결혼식에 참가합니다.

 

천체 사람들은 자신이 이전에 만났던 부류의 인간과는 다른 유형입니다. 이들은 나이 차이를 드러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름답고 나이보다 젊어 보입니다. 천체 사람들은 그다지 개별적 삶을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혹성에서 혼자 사는 사람은 거의 드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운 취향을 가꿉니다. 예컨대 이곳 사람들에게는 머리카락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오래 전의 시대에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가발을 쓰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직위라든가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등을 식별하게 해주는 수단이 됩니다.

 

F. W.는 신부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모두가 나체로 지낸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주인공은 이를테면 과거에 여왕이 목욕하기 위해서 나체를 드러내고, 남자들이 운동 경기장에서 나체 혹은 반나체로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던 스포츠를 기억해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옷 벗고 운동했다는 사실만을 말해줄 뿐, 이곳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방식에 해당하는 나체의 삶과는 무관합니다. 집안에서 옷을 걸치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들이 이를 바라보며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색한 감정이라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아무런 가식 없이 그야말로 옷 없이 순진무구하게 살아갑니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만든 알마 말러의 인형. 그는 뜨겁게 사랑하는 알마 말러를 한 시도 잊을 수 없어서 인형을 만들었다. 코코슈카는 입대 후에 그미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장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1. 빛이란 때로는 불명료함을 드러내는 도구일 수 있다.: 물론 빛이 환하게 비친다고 해서 나체의 생활관습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빛은 대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흐릿하게 해주고 대상의 윤곽을 불명료하게 투시하게 한다는 점에서 천체 사람들에게 안온한 마음을 품게 해줍니다. 이러한 유형의 조명은 방이라든가 벽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F. W.는 처음에 이러한 조명의 빛을 벽걸이 양탄자로 인지할 정도였습니다.

 

빛은 사물을 명료하게 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윤곽을 흐릿하게 함으로써 개개인에게 전혀 다른 분위기를 식별하게 해줍니다. 이를테면 근시안을 지닌 사람이 안경 없이 세상을 바라보면, 불빛은 찬란한 튤립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인간에게 현실은 눈에 피상적으로 투영되는 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정서에는 가시적 상보다, 비가시적 상이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상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즉 조각상을 바라보고 골몰할수록, 우리는 그게 형태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조각상은 그럴수록 관찰자의 마음속에 자신의 관찰을 통해서 무언가 변화된 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12. 첫 번째 위기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종말: F. W.는 신랑과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랑이 완전히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기를 수집하고, 잿빛 과거의 시대의 원시적 물건들을 즐겨 모읍니다. 이오-도가 수집하는 것은 주로 과거의 권총 종류들이지요. 신랑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를 파괴할 수 있는 작은 대롱과 같은 관 (管) 또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관을 지닌 자는 마음만 먹으면 도시 전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관을 이용해서 최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도 했습니다. 무기 수집에 혈안이 된 자의 방에서 주인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암울함 그리고 가슴 답답함을 느낍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자신을 찾은 손님에게 염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위협을 당하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위협은 실제 현실에서 출현하는 전쟁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니라, 사이버 현실의 가상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공격성향과 방어를 위한 저항입니다. 일부의 천체 인간들은 일부의 동족에게 그리고 미지의 생명체에게 자신의 우울과 심리적 광기를 앙갚음하기 위해서 광기의 공격을 퍼붓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없다고 해서 인간관계의 갈등과 이로 인한 투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은 파괴되고 천체 인간의 삶은 안타깝게도 종언을 고하고 맙니다. 이러한 사건은 작은 실수로 인한 인재 (人災)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멸망의 전환점”과 같습니다. (Werfel: 218). 어쩌면 혹성의 파괴는 역사적 파국의 영원한 회귀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하 세계가 폐허 속으로 내려 앉게 되자, 혹성에서 살아남는 자는 다소 야만적인 “중겔 Dschungel”들밖에 없습니다. (Werfel: 84).

 

13. 주위 환경: 101945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이버 상의 가상적 심리적 전쟁을 제외하면- 실제 현실에서의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켰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모든 갈등이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게 하는 모든 조처를 강구하였습니다. 물론 과거의 모든 과학 기술 내지 기계적 동력은 대대적인 범위로 파괴되었지만, 고도의 과학은 새로운 사회에서 삶의 편리함을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술자들은 바퀴를 굴려 이동하는 모든 탈것을 폐기처분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에는 국가, 계급, 강제 노동 그리고 권력 지향의 엘리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천체인간들은 지하의 도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에서는 공공연하게 장삼을 걸치고 다니며, 집안에서는 발가벗고 활보합니다. 그렇지만 빛이 흐릿하여 그들의 나체의 윤곽은 밖에서 명료하게 비치지는 않습니다. 천체 인간들은 식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영양소가 함유된 음료수를 마시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음료수는 마치 과거 신들이 마시던 넥타를 연상시킵니다. 수많은 동물들이 사멸해 있으며, 몇몇 동물들만이 스스로를 발전시켰습니다. 개 종류는 아직도 인간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종의 개들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들 역시 많이 변해 있습니다. 개들은 더욱 사람들을 충실히 따릅니다.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를 위해서 일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곳 혹성에서는 인간의 특성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노동자, 시대의 유대인은 그 자체 일당백으로서, 과거에 수십명, 수백명이 행하던 노동을 혼자 수행합니다.

 

14. 죽음을 극복한 삶: 놀라운 것은 천체의 인간들이 죽음의 영역을 하나의 현실공간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천체의 인간은 마지막 시기까지 언제나 젊게 보입니다. 인류의 수는 매우 줄어들어 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마치 에스페란토 언어와 같은 유형의 한 가지 언어에 불과합니다. 천체의 인간은 더 이상 암 (癌)과 같은 치명적 질병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오랜 수명을 누립니다. 가령 인간의 평균 수명은 약 270년 정도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간은 심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발전된 신체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조차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고, 자유의지에 따라 “안락사 Euthanasie”의 시술을 받은 다음에 “겨울 정원”으로 떠납니다. 조만간 생명을 잃게 될 사람은 다시 겨울 정원으로 들어가서 스스로를 이전의 태아 형태로 변환시키게 합니다. 때로는 인간의 영혼은 “씨눈 Blastozyste”으로 전환되어서, 다른 생명체에 이식될 수도 있습니다. 추측컨대 베르펠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의사인 알크마이온 Alkmaion의 사고를 받아들여서 이를 작품 속에 문학적으로 반영한 것 같습니다.

 

알크마이온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연결시키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Gadamer: 286). 여기서 작가는 삶과 죽음 사이를 분명하게 경계 짓는 서양 사람들의 세계관을 의식하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간의 영혼이 씨눈으로 보존되는 겨울 정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양인들의 윤회설이 작가 베르펠에 의해서 작품 속에 도입되고 있는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의에 의해서 죽음의 영역인 겨울 정원에 들어설 수 있으며, 죽음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금 이후의 세계에 다시 탄생할 수 있도록 미리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래 인간들은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생명의 윤회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비근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미셀 우엘벡 Michel Houellebecq의 『어떤 섬의 가능성 La passibilité dúne île』(2005)에서도 다시금 언급되고 있습니다. 서기 4000년에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엘로힘 숭배자들은 영생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자체를 권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염색체를 보관하여 먼 훗날 동일한 생명체인 클론으로 재탄생하도록 조처합니다.

 

15. 디지털 실험실로서의 학교: 프란츠 베르펠은 공상과학 소설가 쥘 베른처럼 과학 기술에 관한 세부적 사항을 상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과학 기술과 이와 관련된 삶을 서술할 때 가급적이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합니다. 예컨대 지하 도시에는 디지털 도서관이 있는데, 이곳은 이전처럼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수십만 권의 도서 그리고 여러 종류의 자료들은 새로운 매체의 개발로 인하여 얼마든지 하나의 거대한 책장 속에 보관될 수 있으니까요,

 

이곳에는 이른바 “드제벨 Djebel”이라고 불리는 학교가 있습니다. 드제벨은 이른바 우주학교로서 주로 혹성과 혹성을 여행하는 사람 그리고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양성하는 기관입니다. 이곳의 연구를 통해서 태양계를 넘어선 우주의 작은 구석구석 발견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드제벨의 하급학교 학생들은 실습 삼아서 태양계의 혹성으로 여행하며, 우주에 관한 지식을 차례대로 섭렵해나갑니다. 혹성들은 제각기 사도들의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베드로의 혹성에 내리는 사람들은 머리를 땅바닥에 부착시켜야 합니다. 이는 마치 거꾸로 처형당하기를 자청한 베드로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학생들은 우주선을 타고 함께 여행하는 게 아니라, 추진 장치 에너지가 부착된 우주복을 입고 마치 자그마한 혜성처럼 개별적으로 비행합니다. 드제벨 학교 출신의 사람들로 인하여 우주의 거의 모든 공간이 천체인간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알마 말러

 

16. 노동 부재의 사회: 태어나지 않은 별에서 노동자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는 물건을 개인적 욕구에 의해 생산해내지 않습니다. 그는 분수가 있는 어느 공원에서 생활하는데, 그곳에서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엄청난 물건들이 몇몇 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물건들은 별들의 놀라운 힘에 의해서 분수에서 출토됩니다. 별의 광선이 상품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곳의 우주인들은 힘들게 노동함으로써 재화를 창출해내지 않습니다. 삶에 있어서 노동의 비중이 덜한 관계로 긴장감은 약화되어 있으며,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혹성의 표면은 이전보다도 더 둥글고, 들쑥날쑥한 분화구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치 지구에서와 같은 자연스러운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주위 환경은 온통 잿빛 납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끊어진 길을 싫어하며, 직선의 방향을 선호합니다. 천체 사람들은 서있거나 누워 있으며, 어딘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자발적 의지를 지니며, 움직이기를 좋아합니다. 인간은 목표로 향해서 노에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치 목표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긋하게 행동합니다. 모든 여행 내지 이동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됩니다. 자아 자신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과학적 기계를 이용하여 목적지가 자신에게 근접하도록 사차원의 계기 (計器)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17.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가상적인 삶: F. W.는 3일 동안 체류하면서 이곳의 제반 상황을 모조리 터득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시대로 되돌아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유한 두 가지 세계의 이질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베르펠이 살았던 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시기였습니다. 주인공은 전쟁을 피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의 뇌리 속에는 미래의 암운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의 발언은 민족 사이의 화해를 고취시키는 것이었지만, 인간은 신으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태초의 시대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동일한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경우 죽음은 인지되지 않고, 삶에 대한 강한 집착만이 인지될 뿐입니다. 제각기 서로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에 아무런 준비 없이 오로지 생 (生)에만 집착하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과 봉착하게 된다고 베르펠은 유추합니다. (Zemsauer: 121). 요약하건대 작가는 죽음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천체 인간에 관한 삶을 독자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어떤 숙명론적 강제성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죽음보다도 더 막강합니다. 물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죽는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오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죽음은 삶의 구원으로서의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