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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2)

필자 (匹子) 2021. 8. 1. 10:29

6. 서울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골트문트는 사랑에 잘 끌리고, 외로움을 잘 타는 섬세한 청년이었습니다. 외로움은 그로 하여금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조로운 삶은 그로 하여금 어디론가 멀리 방랑하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방랑벽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골트문트의 이러한 특성은 주인공의 친구 나르치스에게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나르치스는 진리와 사랑을 누구보다도 신에게서 발견하려고 처음부터 작심하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그는 세속적 삶과 사랑의 유혹을 받지 않고, 수도원 속에서 안온한 마음으로 명상에 침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인간 삶의 깊은 뜻을 체득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나르치스는 처음부터 진리와 순수한 신앙을 발견하여, 이를 고수하려고 했다면, 골트문트는 본의 아니게 실수와 죄를 저지르면서, 반성과 후회 등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죽기 직전에 알아차립니다.

 

오토 뮐러의 그림 "연인들"

 

7. 성적 탐닉은 도박과 같다.: 다시 소설 내용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골트문트는 그 지역의 왕의 애인인 아그네스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아그네스는 왕이 정치에 골몰할 때면 언제나 성 밖으로 나와 산책을 즐기곤 하였습니다. 이때 준수하게 생긴 청년, 골트문트가 그미의 눈에 발견됩니다. 다른 한편 골트문트의 눈에는 아그네스가 비록 왕녀로 살아가고 있지만, 궁궐이라는 새장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불쌍한 새 한 마리처럼 비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뜨거운 육체적 사랑을 나눕니다. 이 순간 그는 생애에서 가장 진득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고로 탐닉이란 일종의 도박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게 그것이 아닌가요? 골트문트는 가장 진득한 사랑의 체험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그것을 재차 체험하려고 합니다. 계속 아그네스를 만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성에서 그미를 만나려 했을 때, 골트문트는 왕의 부하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구금당하게 됩니다. 왕의 애인의 몸을 탐했으니, 처형당하는 게 마땅하는 것이었습니다. 처형 직전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때 우연히 그곳에 머물던 나르치스는 주인공을 발견하고, 그를 구출해줍니다.

 

8. 골트문트에게 인생은 말 타는 일과 같은 것일까?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함께 수도원으로 돌아옵니다. 주인공은 아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수도원 내부에 작은 작업실을 만들어 조각 작품을 제작합니다. 골트문트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트문트는 수도원 생활을 몹시 갑갑해 합니다. 결국 그는 수도원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골트문트는 왕의 첩실인 아그네스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자고로 인간의 열정은 시간의 흐름에 변하게 되는 법입니다. 주인공에 대한 아그네스의 사랑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그미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더 이상 골트문트와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자와의 승마 Eskapade”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에 주인공은 하필이면 말에서 떨어져, 부상당하게 됩니다. 골트문트는 나르치스의 품에 안긴 채 서서히 죽어갑니다.

 

9. 바람둥이는 대부분 효자이다. 골트문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넨 어떻게 죽으려 하는가? 자네에게 어머니가 없다면? 어머니 없이는 사랑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거야.” 사실 골트문트는 어머니 없이 자랐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여성 편력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플레이보이치고 효자 아닌 사람은 없지요.

 

어머니에 대한 과도한 사랑은 연적인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배가되고, 어머니를 차지할 수 없는 내적 아픔은 과도한 사랑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도한 사랑은 한 여성에게 심리적 성적 만족으로 이어지지 않고, 또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리게 작용합니다.) 물론 어머니 없이 자랐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골트문트처럼 그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자에게 어머니에 대한 사랑, 혹은 여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평생의 사랑의 삶을 좌우하는 척도가 됩니다.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10.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의 방식: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독일의 교양 소설의 전통에 입각해 있습니다. 골트문트의 삶의 길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그 하나는 맨 처음 수도원을 떠날 때부터 조각가 니클라우스를 떠날 때까지의 단계라면,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수도로 향하는 시기부터 죽을 때까지의 단계입니다. 처음의 단계는 도주 내지 떠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음의 단계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내지 회귀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리비도에 대한 개인의 갈망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두 번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충동이 수렴되는 전체적 갈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개인적 어머니 상 배후에 도사린 원형 (Archetyp)의 영향력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페스트에 대한 체험은 작품 내에서 타나토스의 충동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계기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인간의 생애에 전체성으로서의 갈등 구조의 전환점이 분명히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11. 나르치스, 그에게도 내적 갈등은 있다.: 부언하건대 나르치스는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삶의 방식과는 대조되는 인간형입니다. 그의 성격은 정신과 신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골트문트의 (원을 그리는) 방황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르치스는 영원한 안내자 내지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교사는 나르치스가 아니라, 오히려 골트문트입니다. 나르치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자는 바로 골트문트가 아닌가요? 인간 삶이란 정신과 신적인 것에 의해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모성적인 정령적인 요소에 의해 영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파시즘을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자신의 도취충동의 근본을 모성적인 정령으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자고로 잘못을 저지르는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 아닐까요?

 

12. 인간과 우주의 두 가지 특성:『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이 책은 임홍배 교수의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다양합니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극찬했는가 하면, 평론가 칼 하인츠 데쉬너 (K. H. Deschner)는 1957년에 이 작품을 “썩어빠진 낭만적 대중소설”이라고 혹평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 인물을 곰곰이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르치스는 차가운 머리로, 골트문트는 따뜻한 심장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두뇌 가운데 좌뇌로, 후자는 우뇌로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나르치스는 하나의 가치 척도를 추구하는 질서지킴이로 비유될 수 있다면, 골트문트는 감성과 우정을 도모하는 자유의 옹호자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에는 언제나 신적 존재와 존재 자체로서의 자연이 자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헤세의 두 인물에서 교묘하게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인물이 개별적 존재의 이원론에 입각해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친구를 통해서 서서히 자기 자신을 변모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의 변화 태극의 상호 움직임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헤세는 서양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양의 사상과 삶의 방식을 작품에 도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