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 (2)

필자 (匹子) 2019. 5. 7. 10:36

9. 성의 투쟁, 사랑 그리고 살인: 클라이스트의 극작품은 등장인물의 심리적 관계를 직시하여, 거기에서 어떤 병리학적 문제를 예리하게 추출하고 있습니다. 병리학이 전혀 발달되지 않은 시점에서 전투적 열광 그리고 성적 열광의 뒤엉킴을 탁월하게 묘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펜테질레아는 사랑에 관한 놀라운 상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성의 투쟁으로서의 상”입니다. 에로스에 대한 갈구와 이성에 대한 증오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여주인공은 그것들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게오르크 슈타이너가 영리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작품 「펜테질레아」는 “장검의 춤”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 사마귀 혹은 거미들이 행하는 사랑의 혈투: 그리스 영웅과 아마존 여왕은 서로의 성을 탐하며 상대방에게 다가가지만, 이러한 시도는 살인을 위한 구애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실제로 제 7장면에서 펜테질레아는 전쟁에서 노획한 번쩍이는 장신구를 걸치고, 자신의 투쟁욕을 드러내면서 춤을 춥니다. 이러한 유형의 역설적인 상들이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펜테질레아가 처해 있는 비극적 상황입니다. 아마존의 삶의 양식은 여자들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남자를 굴복시킨 뒤 납치하여, 단 한번 남자와 “교접”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여주인공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사랑합니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여주인공을 결국 파국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미에게는 삶의 의미를 자발적으로 찾아서,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되어 있습니다. 펜테질레아가 광기의 혼돈 속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사랑을 어떤 죽음의 파국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 신의 질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펜테질레아가 생의 마지막에 겪어야 하는 비극은 한마디로 형이상학적 위기입니다. 그것은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의 질서를 인간 삶의 표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와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19세기 작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신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징표로서 자연의 신비로운 현상을 예로 들지 않았는가요? (예컨대 괴테는 자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마력적인 요소 내지 영묘한 신비로움을 작품 속에 반영했지만, 이를 신적 질서와 무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12.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는 아마존의 법: 클라이스트의 경우 아마존 국가에게 철저한 복종을 강요한 자는 마르스 신 그리고 디아나 여신이었습니다. 아마존의 법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뜻에 의해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마르스 신은 아마존 처녀들에게 전쟁터에서 자신이 사랑할 남자를 고르도록 조처했던 것입니다. 아마존 처녀들은 여전사로서 신이 점지해준,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제 15장면에서 펜테질레아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찾습니다. 제 9장면에서 아프로디테는 여주인공에게 탄식을 터뜨리며, 충고합니다. 즉 어느 특정한 영웅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사랑하라는 게 아프로디테의 충고였습니다. 물론 펜테질레아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마르스 신은 펜테질레아로 하여금 예외적으로 아킬레스를 점지해 주었다는 유언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테질레아는 자신이 어떻게 사랑과 죽음의 질곡에 묶이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합니다. 가령 제 15장면에서 주인공 두 남녀는 전원적인 섬에서 유유자적하게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킬레스가 꾸민 가식적인 분위기에 불과합니다.

 

 

 

13. 현실과 가상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는 인물들: 펜테질레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에 누운 채 자신이 아킬레스를 무찔렀다고 착각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유희는 세계의 비극적 토대 위에서 하나의 미적 가상의 다리를 형성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두 남녀는 결코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극작품 「홈부르크 왕자」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전원적 풍경에서는 아름다운 가상의 다리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 대립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해방된 마지막의 상으로 작용합니다. 이에 비하면 작품 「펜테질레아」에서 사랑의 가교는 실제에 있어서 파괴되고, 두 주인공들은 바닥없는 심연 아래로 추락하고 맙니다.

 

 

 

14. 두 사람은 현실적으로 행복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다.: 펜테질레아는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니라, 아킬레스가 승리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때 그미는 자신의 사랑이 죽음에 의해서 분열되리라는 것을 처절하게 의식합니다. 제 15장에서 그미는 다시 한 번 연인에게 “디아나 여신의 신전이 산정에 솟구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도저히 결합될 수 없는 것을 결합시키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아마존 여성들은 그미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모든 전리품을 포기하면서, 그들의 여왕을 적진으로부터 되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펜테질레아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아마존의 법을 무시하려고 할 때, 아마존 여성들은 순간적으로 그미와 대립합니다. 그러자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된 펜테질레아는 자신의 사랑이 (신의 뜻에 의해) 기만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탄식을 터뜨립니다. 아킬레스가 첫 대결 시에 일부러 져주는 척하는 행위를 생각해 보세요.

 

 

 

15. 서로 다른 이해관계, 아킬레스, 펜테질레아에게 의도적으로 패배하려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펜테질레아의 가슴은 사랑의 격정으로 출렁거립니다. 그렇기에 그미는 아킬레스의 저의를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아킬레스가 자신의 성을 탐하기 위해서 일부러 져주기로 결심한 저의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그미는 자신과 아킬레스 그리고 그들 사이의 현실적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차립니다. (이러한 특성은 클라이스트 문학에 있어서 거의 유형적인 것입니다.) 세계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어떤 더 나은 일원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 그것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밖에 없습니다. 가령 「케트헨 폰 하일브론」에서는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너희 신들이여,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16. 임을 사랑하면서, 죽이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는 지금까지 그렇게 자주 무대 위에서 공연되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은 24 장면 속에 극적인 긴장감을 담고 있고, 공간적 시간적 구도를 몇 장면 속에 응집시키고 있으며, 사건 진행은 마치 폭포와 같이 이어지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작품의 고유한 행위는 전통적인 보고 형식을 통해서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항이 극작품의 공연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클라이스트의 극적 언어에 대해 놀라운 찬탄을 금할 수 없으며, 등장인물의 내적 사고와 외적 행동이 멋지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