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서로박: 레온하르트의 '결산'

필자 (匹子) 2021. 1. 8. 18:43

친애하는 K, 루돌프 레온하르트 (Rudolf Leonhard, 1889 - 1953)는 훌륭하고 탁월한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독일에서도 그리고 해외에서도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레온하르트의 시 한 편을 번역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아래의 작품은 1949년에 발표한 「결산 (Bilanz」입니다.

 

평생 집 한 채 짓지 않았다. 아마도

내 이름을 택한 도로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손수 뽕나무 곁에서 뜨거운

장벽 가로 옮겨 심은 송악은

오래 떠나 있던 동안에 이미

말라죽고 말았다. 심어둔 어떠한

식물이 자란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떠한 성숙도 알지 못했다.

 

사랑하던 바람과 함께 날았다,

떨어져 발 디딘 적이 없는 씨알,

나는 바람을 사랑했다, 너무도

강렬하게 그리고 바람처럼

여러 바람들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사라지고, 풍상 겪으며, 흩날리고, 표류했다.

도로 가장자리 황폐해졌다. 암석들 비 내린다.

 

“Kein Haus hab ich gebaut und keine/ Straße wird meinen Namen tragen.// Der Efeu, den am Feigenbaum/ ich an die heiße Mauer zog,/ ist angegangen, als ich lange/ schon weg war. Keine Pflanze, die/ ich pflanzte, hab ich wachsen sehn/ und keine hab ich reif gekannt.// Ich flog im Winde, den ich liebte,/ Same, der nicht fiel und fußte,/ ich hab den Wind geliebt, ich hab/ zu sehr geliebt, und wie die Winde/ und mit den Winden bin ich ganz/ vergangen.// Vergangen, verwettert, verweht, verschlagen./ Der Straßenrand ist wüst. Es regnet Steine.”

 

친애하는 K, 루돌프 레온하르트의 고향은 “리사 (Lissa)”입니다. 지금은 폴란드의 레즈노 (Leszno) 라는 지역이지요, “리사”는 19세기 말에는 프로이센 제국에 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며, 자신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베를린과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방랑은 1914년부터 시작됩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온하르트는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전쟁에 자원입대를 촉구했으며, 수많은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독일 군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레온하르트는 패전국의 군인으로서, 연합군이 주최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1918년에 레온하르트는 카를 립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초기 사민당 (USPD)에 가입한 것도 그 무렵이지요. 레온하르트는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열렬하게 지지하였으며, 틈틈이 시와 산문 작품을 집필하곤 하였습니다. 1928년에 문우인 발터 하젠클레버 (Walter Hasenclever)의 초대로 프랑스 파리로 갔습니다. 몇 년만 지체했더라도 레온하르트는 아마도 독일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만간 레온하르트라는 이름은 제 3제국의 요주의 인물로 독일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친애하는 K, 루돌프 레온하르트는 행동하는 작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에 가담하여 프랑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쁜 와중에도 소설집 『돈 키호테의 죽음 (Der Tod des Don Quijote)』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1939년에 레온하르트는 프랑스를 장악하던 독일군에 체포되어 르 베르네 (Le Vernet) 카스트르 (Castres) 등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이른바 “빠삐용”의 행적과 매우 흡사합니다. 독일의 SS 대원이 그를 본국으로 송치하려고 했을 때, 레온하르트는 포로수용소를 두 차례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첩자에 의해서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1944년 그는 마침내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데 성공을 거둡니다. 그후 레온하르트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마르세이유 (Marseille)에서 숨어 지냅니다. 해방 후에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다가 1950년 동독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구동독으로 귀환할 무렵, 그의 심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예순의 나이에 레온하르트는 서서히 눈이 멀게 됩니다. 그의 주위에는 가족이라고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레온하르트는 50년대에 이르러 시력 뿐 아니라, 청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증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레온하르트의 파란만장한 삶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삶을 인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의 인용 시는 1949년에 집필된 것입니다. 시는 모두 네 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은 2행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연은 제각기 6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는 매우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표현 속에는 시인의 어떤 비범하고도 고독한 행적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제 1연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느 영역에서 일가 (一家)를 이루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커다란 명성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토로합니다. 그만큼 시인은 고해의 바다에서 거룩한 이념을 추구하면서, 오디세이처럼 항해한 게 분명합니다.

 

“송악”은 레온하르트가 다른 작품에서 자주 사용한 시어입니다. 송악은 주지하다시피 담장나무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송악은 예부터 지조 내지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식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생명력이 질긴 송악을 자신에게 비유하여, 폭력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으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송악은 말라 죽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가꾼 어떠한 식물도 성장하는 것을 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주위의 사람들을 돌보지도 못하고, 그저 앞으로 향해서, 다시 말해서 혁명 전선으로 향하여 수미일관 걸어갔던 것입니다. 시인이 바람을 사랑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바람은 거룩한 이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강렬하게” 바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식물”, “바람” 그리고 “씨앗”의 이미지는 시구 속에서 기이하게 충돌하면서 묘한 대비를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너무나 바람을 사랑한 나머지, 식물을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자신의 씨를 제대로 뿌리며 살지 못했습니다. 제 4연에서 시인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저 신체적인 고통만이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지요.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오는 동안에 그의 고향은 “황폐”해졌습니다. 고향의 풍경은 그저 “암석”입니다. 그곳에 비만 내릴 뿐, 인적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K, 그렇다면 루돌프 레온하르트에게 가족이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1918년 레온하르트는 작가인 주잔네 쾰러 (Susanne Köhler, 1895 - 1984)와 결혼하여, 아들 볼프강 레온하르트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불과 삼 년 후에 이혼하였습니다. 주잔네는 여류 작가로서 당시의 정치가 카를 립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친구였습니다. 그미는 혼자 아들을 키우다가 나중에 레닌의 친구인 소련의 대사, 미치슬라프 브론스키 (1882 - 1938)와 재혼하였습니다. 아들인 볼프강 레온하르트 (Wolfgang Leonhard, 1921 - 2014)는 현재 소련 정치학 그리고 역사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스탈린 치하에서 체포되었을 때 모스크바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940년에 볼프강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조처를 당했으며, 1945년에 발터 울브리히트와 함께 동베를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950년에 구서독으로 이주하여, 오랫동안의 소련 체험 그리고 구동독의 체험을 『혁명은 자식들을 쫓아버린다. (Die Revolution entläßt ihre Kinder)』를 발표하였습니다. 볼프강 레온하르트는 1960년대에 그는 예일대학에서 소련 정치에 관해 강의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지요. 어쩌면 루돌프는 동베를린에서 한 번 아들과 재회했을까요? 이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름과 같습니다. 1948년 볼프강이 구동독에 머물 무렵,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에 머물던 어머니를 독일로 데리고 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1950년에 모자는 마침내 구서독에서 상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