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평자 내지 사상가로서의 코이너: 친애하는 Y, 이제 당신을 위해 『코이너 씨의 이야기』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나의 말씀이 당신의 개별적 발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브레히트는 30년대 “학습극 Lehrstück”을 집필할 시기에 해설과 가르침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물에 해당하는 자는 사고하는 자, 즉 사상가입니다. 자고로 “사고하는 자”는 무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관객에게 논평해야 하는데, 이러한 인물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극 작품은 무엇보다도 극적인 진행과정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주로 합창을 통하여 논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합창이 사라진 현대의 극작품에서 극작가가 무대 위에 논평하는 인물을 등장시켜서, 그로 하여금 사건의 진행과정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브레히트는 주로 장면의 첫 부분에 간략하게 사건의 진행 과정을 비판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논평자를 제외시켰습니다. 어쩌면 『코이너씨의 이야기』는 극작품에서 마치 사생아처럼 빠져나온 극작품의 분신일지 모릅니다.
(2) “코이너”라는 명칭은?: 친애하는 Y, 주인공의 이름이 왜 하필이면 “코이너”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무합니다. 첫째로 “코이너”라는 이름은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E. Hauptmann)에 의하면 그 자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독일 슈바벤 지역에서는 독일어 발음인 “ei”를 “eu”라고 발언하는 경향이 있는데, 브레히트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명명했다고 합니다. 둘째로 코이너는 비련의 문학 평론가, 발터 벤야민 (W. Benjamin)에 의하면 “koiné, κοινή”에서 파생된 인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koinos”는 보편적인 무엇, 모든 사물에 해당하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코이너 씨는 모든 사물을 안내하고 주도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안내자” 내지는 “주동자”라는 일반적 의미와는 다르지요. 코이너 씨는 작품 내에서 웅변가도 아니고, 마치 히틀러와 같이 야심에 가득 차 있는, 충만한 에너지의 인간도 아닙니다.
(3) 꾀 많은 현인으로서의 코이너: K씨가 행하는 일감은 무엇보다도 “사고”입니다. 코이너 씨는 벤야민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영리한 중국인처럼 교활하고, 대단한 순응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공자 (孔子)와 같은 인물로서 대단한 집념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거대한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브레히트는 에세이 『진리를 쓰는 데 있어서의 다섯 가지 어려움 Fünf Schwierigkeiten beim Schreiben der Wahrheit』에서 다섯 번째의 가치로서 기지 (List) 내지는 술수를 자주 거론하였습니다. 지식인이 스스로 다치거나 피해당하지 않고, 감추어진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직설적 발언 내지 노골적인 행동 대신에, 어떤 기지 내지는 교묘한 술책을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브레히트는 토마스 모어 그리고 공자를 예로 들었습니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영국의 부패상을 직접 거론하는 대신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를 묘사하였으며, 공자는 폭군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항상 우회적 태도를 취하며, 칭찬의 말 속에 가시를 삽입시킬 줄 알았습니다. 예컨대 공자는 “군주가 철학자 모씨를 죽이게 했다.”에서 “죽이게 했다”를 “살인하도록 조처했다”라고 바꾸어 쓰는가 하면, “군주가 시해되었다”라는 표현 대신에 “군주가 처형되었다.”라고 고쳐 기술하곤 하였습니다.
(4) 낯선 자, Nobody, 골리앗에 대항하는 다윗: 다시 발터 벤야민의 주장을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코이너 씨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여건에 뛰어든, 낯선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타자로서의 오디세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벤야민은 코이너 씨가 지향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가령 오디세이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우스가 거주하는 동굴에 갇히게 되었을 때, 부하들과 함께 기지를 발휘하여 포도주를 제조하여, 그를 만취하게 만든 다음에 무찌르지 않습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외눈박이 거인은 기존하는 계급 국가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인간군을 상징합니다. 이에 비하면 코이너씨는 어느 특정한 계급 사회에 뛰어들어서 기득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권력자를 무찌르는 지혜로운 인간입니다. 바로 그 이방인이 다름 아니라 오디세이이지요.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면모는 코이너라는 이름 속에 은밀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코이너”는 독일어로 “낯선 자 Keiner”입니다. 독일의 남서부 사람들은 독일어 “Keiner”를 “코이너”라고 발음하지요. 이를 고려할 때 코이너 씨는 “낯선 자 nobody”입니다. 그는 새로운 계급 사회에 뛰어들어서 금력과 금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간을 물리치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을 물리치려고 의도하고 있는 꾀 많은 현인과 같습니다.
(5) 묵자의 사상: 셋째로 코이너씨는 또 다른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K씨는 이를테면 “킨너 Kinner”라는 이름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습니다. 킨너는 브레히트의 또 다른 산문, 『메티, 변전의 서 Meti. Buch der Wendungen』의 등장인물, “킨예 Kin-jeh” 내지 “킨래 Kin-leh”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묵자는 겸애설을 주장한 중국의 학자로서 제자백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브레히트는 30년대부터 중국의 현인 묵자 墨子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겸애설, 평화적 극기주의 그리고 과학 기술 추구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묵자의 겸애설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과 유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박애정신보다도 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자신의 것을 약 70% 소유하고 나머지를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묵자의 겸애설은 타자를 자아와 동등시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타자를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간주하라는 것이 바로 겸애설입니다. 따라서 묵자의 겸애설은 자신의 것의 50%를 타자에게 동등하게 나누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묵자는 범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여성이 자신의 누이 혹은 딸이라면 어찌 그미를 겁탈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자신의 이웃을 형제자매라고 여긴다면, 어찌 그의 재물을 강탈할 수 있는가? 이웃 나라가 여동생의 나라라면, 어찌 무력을 사용해서 그 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묵자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인접 국가의 왕을 직접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전쟁을 막았습니다. 나아가 묵자는 자연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방어를 위한 성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자신의 기술을 발휘하여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견고한 성 (城)을 생각해 보세요. 따라서 브레히트는 평화를 지향하는 전쟁 반대론자, 묵자에 대해서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코이너 씨는 브레히트 자신일 수 있다: 어쨌든 브레히트는 묵자의 사상에 심취하여 작품 내에서 자신을 “킨예 Kin-jeh” 내지 “킨래 Kin-leh”라고 명명했습니다. 브레히트는 산문 작품,『메티. 변전의 서』에서 마르크스, 헤겔 등 수많은 사상가들을 등장시켜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메티. 변전의 서』는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를 지니지 않는 대화문집으로서,『코이너 씨의 이야기』,『망명자의 대화』 등과 함께 브레히트의 시대 비판 및 평등사상의 사상적 모티프를 담고 있습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코이너”는 어쩌면 브레히트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아 보입니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1941년 미국에서 자신의 친구 미하일 아플레틴 (M. Apleti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카를 킨너 Karl Kinner”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반공주의의 경향을 지닌 국가인 미국에서 피해입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코이너가 브레히트로 규정될 수 없다면, 우리는 “코이너”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코이너씨는 브레히트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브레히트의 또 다른 자아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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