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서로박: 작자 미상, 당신은 나의 것

필자 (匹子) 2022. 3. 10. 09:10

당신은 나의 것, 난 당신의 것

반드시 이를 믿어야 해요.

당신은 내 심장 속에

그냥 싸 안겨 있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당신은 항상 거기 머물러야 해요.

 

(Dû bist mîn, ich bin dîn./ des solt dû gewis sîn./ dû bist beslozzen/ in mînem herzen,/ verlorn ist daz sluzzelîn:/ dû muost ouch immêr darinne sîn.)

 

(해설)

 

우리가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결핍된 무엇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핍된 무엇이 어렵사리 얻어진 다음에도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처음부터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된 채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 동물의 마음은 항상 일부 혹은 전부 비어있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허전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설령 사랑하는 임이 곁에 있어도 그러한 허전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거대한 갈망으로서의 사랑 역시도 완전히 충족되는 법은 드물지요. 동물은 욕망이 충족된 뒤에도 쓸쓸함을 감지하곤 합니다. “모든 동물은 교접 후에 쓸쓸함을 느낀다.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비록 순간이라 하더라도, 심리학자 페렌치 (Ferenczi)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행복을 암수의 결합 상태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은 누구든 간에 지지자 내지 받침대를 필요로 합니다. “인 (人)” 자를 생각해 보세요. 아니,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요 (凹)는 철 (凸)을 필요로 하고, 철 (凸)은 요 (凹)를 필요로 합니다. 모든 동물은 이성을 찾습니다. 이러한 방황은 마음이 허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허전함으로 인한 방황 - 이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글로 표현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수사들이었습니다. 가령 그들은 "인간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만,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존재이다. Omnia habentes, nihil possidentes."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혼자서는 항상 불안하고, 누군가를 찾지만, 설령 한 사람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이 허전한 한, 불충족한 존재, 그는 바로 인간입니다.

 

앞에 인용한 시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2세기 중엽의 필사본에 기록되어 있는데, 필사본은 남부 독일의 테건 호수 근처의 수도원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문헌학자들은 그곳의 어느 수녀가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수녀는 라틴어 산문과 수사학에 정통한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당신은) 반드시 이를 믿어야 해요 (des solt dû gewis sîn.)”라는 문장은 수사 혹은 수녀들의 신앙 맹세를 연상시킵니다. “확신하세요. 당신에게는 계승자가 없지만, 그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Esto securus, successor nemo futurus, est tibi, sed nec erit; mihi ne nemo placebit.” 여기서 “확신하라.”는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라는 강령으로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corpus Christi)”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려는 종교적 열광은 마리아의 환영으로부터 마돈나 숭배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가장 고결한 분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적 합일 unio mystica”으로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아직 세상에 제대로 밝혀진 바 없는 “이브의 복음”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며, 당신은 나입니다. 당신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으며, 모든 생명 속에 씨 뿌려져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오시든 간에 나를 모으십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모은다면, 당신은 자신을 모으시는 셈입니다.” 나와 너의 신비적 결합을 이처럼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고결하게 형상화시킨 글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미학에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타자 안에서의 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헤겔 미학 14: 146) 인간은 어쩌면 사랑을 통해서 나와 너의 관계를 우리의 관계로 변화시키고, 개체로서의 두 인간을 영혼의 차원에서 하나로 결합시키게 하는지 모릅니다.

 

황지우 시인은 자신의 시집 가운데 한 권을 “나는 너다.”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근원적으로 결핍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머물지 않고, 너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될 때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가능합니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도 주장한 바 있듯이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너”의 기억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이며, 너는 나이다.” 이러한 구절 속에서 우리는 아담에 대한 이브의, 혹은 이브에 대한 아담의 애타는 갈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