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서평): '보들리야르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

필자 (匹子) 2019. 2. 19. 08:21

장 보들리야르 (J. Baudrillard, 1929)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 (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은 1976년 파리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본고는 두 개의 사건에 의해서 착안되었다. 첫째는 70년대에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언어학, 정신 분석학, 인류학, 정치 경제학 그리고 사이버네틱스 등을 결합시킨 사건이요, 후자는 1968년 파리 대학생들의 폭동 사건이다. 학생 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보들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후기 자본주의속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은 목표를 실현시키려는 환영이라는 것이다. 보들리야르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진단하며, 그 특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본서를 집필하였으며, 과거 야만인들의 삶과 현대인들의 삶을 비교하고 있다. 그가 도출해낸 것은 야만인들 그리고 현대인들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상징적 교환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실천 행위를 노동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규정한 바 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내의) 잉여 가치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계급 없는 사회 내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생산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드리야르에 의하면-노동과 실천의 행위로 설명되는 게 아니라, 재생산 (re-production)의 시대나 다름이 없다. 이제 교환 가치는 이용 가치에 대하여 자생적으로 변모해 있다. 다시 말해 재화의 가치는 더 이상 사용 가치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있다.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돈은 더 이상 ‘금 (金)’이라는 매개체를 지니지 못하며, 오히려 (어떤 코드내의 가치로서의) 의미심장함을 지닐 뿐이다.

 

그 대신에 재생산의 기술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의 겉치레의 모델 등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에 관해서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가능성의 시대의 예술」, 마샬 맥루한의 「매체의 이해」 등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포스트 모던한 후기 산업 사회라는 시스템은 불확정성과 결단 불가능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비단 시스템 뿐 아니라, 유행과 성 (性)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성의 관계는 더 이상 “친족의 요소론적 구조”에 의해서 확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남근 (Phallus)”이라는 고착된 물신 숭배로써 정의될 뿐이다.

 

이러한 “해체 (dissémination)” 내지 마르크스주의적 정신 분석학적 해방 이론의 도구는 한마디로 상징적인 것의 개념이다. 예컨대 야만인들은 언제나 죽음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성년식, 장례식 그리고 결혼식 등과 같은 예식을 치르는 동안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와 서로 교환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주고받기는 (등가물로서의) 어떤 추상적 보편성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인 “전도 가능성 (réversibilité)”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해 산 자와 죽은 자의 맞 교환은 제 3자의 중개 없이 한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직접 대치시키려는 욕망을 담지하고 있다. 가령 북미 토인들이 축제일에 치르는 선물 교환을 생각해 보라.

 

서양의 역사를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상기한 상징적 교환은 역사적으로 재생산되어, 결국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 말이다. 중세에 승려 계급의 권력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교묘히 은폐시켰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희생양이라는 거룩한 명예를 부여받지 못하는) 노예와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조우는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삶밖에 없다. 체제로서의 권력은 현대의 노동자들을 죽음이라는 영역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이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셈이다.

 

보들리야르의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 대한 시각은 아주 부정적이다. 질곡의 이러한 형태에 대항하는 반역과 저항은 상징적인 것의 절대적 대립을 복구함으로써,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전적인 도전을 통해서 가능할 뿐이다. 예컨대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저항은 기껏해야 인질극, 감옥 내에서의 자살, 가미가제와 같은 물귀신 방식의 테러 행위 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벽에 그려진 낙서 (Graffito)”, 위트 그리고 포에지 등은 최소한 체제 비판적으로 작용한다. 낙서, 위트 그리고 시구 등은 [모든 선물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대응하고, 이로써 뜻과 가치를 전체적으로 파괴하는 한] (소쉬르가 말한 바 있는) “잘못 쓰인 어구들 (Anagrammen)”과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선한 야만인들”의 방식대로 상징적 교환을 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