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1) 오언의 연방주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3. 4. 4. 10:28

1. 19세기의 유토피아, 경제적 삶의 변화: 이제 19세기의 유토피아의 장으로 넘어가기로 합니다. 19세기의 유토피아는 국가 소설과 같은 문학 유토피아의 방식으로 개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 혁명의 여파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생산력의 신장은 전통적 문학 유토피아에서 설계된, 제반 영역의 이상적 삶을 충족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산업 혁명은 특히 경제적 삶의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하여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서서히 분화되었고, 생산력의 증대는 자본가의 이윤 추구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였습니다.

 

중세의 장원 경제 체제에서 노동에 임하던 노동자들은 도시로 향하게 되고, 대도시의 매뉴팩쳐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하게 됩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최소한 무역과 이윤추구의 상업적 구도가 사라지면, 인간은 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 Fichte였는데, 그의 생각은 자신의 소논문 「폐쇄된 상업 국가」에서 반영되어 있습니다. 피히테는 산업에 관해서 소극적 태도를 취했지만, 최소한 무역을 억제하고 자급자족의 수공업적 경제 구도만으로 주어진 범위 내에서의 만족할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물질주의의 특성을 표방하는 19세기의 유토피아: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전통적 유토피아가 지향하던 사항들, 이를테면 교양을 쌓거나 신앙에 귀의하는 등의 물질과는 동떨어진 행복 추구는 지엽적인 사항으로 변하고, 사회적 질서나 평화 공존의 문제 등은 더 이상 중요한 관건으로 부각되지 않게 됩니다. 대신에 강조된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수준의 상승, 부의 축적이었습니다. 이전의 전통적 유토피아가 정태적 구도의 사회 시스템을 모델로 하여 절약과 극기를 행복한 삶의 미덕으로 규정했다면, 19세기의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주의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령 개인의 행복은 19세기의 유토피아의 모델에서는 대체로 멋진 외제 가구, 단아한 의복과 값비싸고 영양가 높은 식사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Berneri: 193).그 까닭은 인간 삶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노동과 경제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공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은 흑인 노예보다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3. 노동자의 고통을 싸안은 박애주의자: 당시 노동자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노동으로 허비했습니다. 작업 환경도 무척 열악했습니다. 문제는 십대의 미성년자들도 장시간에 걸쳐 공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변변한 식사도 얻어먹지 못했으며, 하루 14시간 이상 죽도록 일했습니다. 불과 열다섯 살 아이가 돼지들 사육 장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 그리고 십장으로부터 얻어맞으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경우 성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밖에 그들의 임금은 너무나 박약한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 대신에 그들이 스스로 만든 상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저녁에 자신이 만든 물품을 팔려고 어두운 거리에서 서성거려야 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영국의 공장주로서 새롭게 고찰한 사회라는 문헌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버트 오언 (Robert Owen, 1771 – 1858)이었는데, 면직물 제품의 생산으로 인하여 당시에 상당히 많은 재화를 축적한 부호였습니다.

 

4. 오언이 창설한 뉴 라나르크 노동자 공동체:: 오언은 1771년 5월 14일 웨일스의 뉴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로서 안장, 철도 물품 등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는데, 우체국의 업무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의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습니다. 경영 수업을 받은 다음에 그는 런던의 백화점에서 잠시 일하였습니다. 오언은 상당히 영리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학문에 뜻을 둔 게 아니라, 사업에 눈을 뜨게 됩니다. 1785년 오언은 친구 존 존스와 함께 맨체스터에 이주합니다. 그것에서 그는 기계 공장을 건립하고, 불과 20세의 나이에 목화 가공업의 사장이 됩니다. 뒤이어 1795년에 찰레스턴 트위스트 회사를 창립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언이 사업에만 전력투구하지 않고, 맨체스터의 철학 협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오언은 협회의 초청으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학문과 관련되는 강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오언은 노예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으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리라고 굳게 결심합니다. 오언은 이상적인 사고를 지녔을 뿐 아니라, 실증주의에 입각한 실천가이기도 하였습니다.

 

1799년에 오언은 자신이 꿈꾸던 사업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모직 공장을 인수하여, 나중에 그의 장인이 되는 데이비드 데일과 함께 뉴 라나크에서 공동체를 건립하게 됩니다. 파산 직전이던 공장은 오언의 노력 끝에 불과 몇 년 내에 영국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일터로 거듭나게 됩니다. 특히 오언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하는 일 외에도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건강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자녀 교육, 안온한 거주 환경이었습니다.

 

5. 오언의 노동 공동체 뉴 라나르크: 1800년부터 1824년 사이의 기간은 오언의 삶에서 황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버트 오언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였습니다.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하루 10시간 39분만 일하면 족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노동력을 극대화한 것이 커다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언은 수입금은 노동자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노동의 욕구를 배가시키게 하였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오언이 노동 환경을 개선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오언은 미성년자들의 노동을 금지시켰으며, 거주 가옥을 건축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적은 액수의 집세로 그곳에서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오언은 질병 보험 및 연금 보험 제도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노동자들과 경영자가 함께 아우르면서 살아가는 작은 코뮌을 실천하였습니다.

 

오언의 조처는 놀랍게도 생산력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오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노동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오언의 개혁적 공장 경영은 영국은 물론이며, 유럽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오언의 공동체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깨끗한 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오언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니콜라우스 1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그리고 독일의 막시밀리안 황제 등 1815년부터 1825년 사이에 매년 약 2천 명의 사람들이 뉴 라나르크를 방문하여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제레미 벤담 Jeremy Bentham 또한 오언의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나중에 러시아의 황제가 될 니콜라우스 공작이 오언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고 합니다. 즉 영국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니, 약 이백만명의 영국인이 러시아로 이주하여 라 나크 공동체를 건설해달라는 게 바로 그 제안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6. 실패한 말년의 실험: 1825에 오언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인디아나의 외베 시에 있는 3만 에이커의 땅을 사서 공동체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오언은 미국에서 “새로운 조화 New Harmony”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 가운데 80 퍼센트를 헛되이 투자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에 가담하는 사람들을 감독하고 조절할 방도가 오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는 너무나 많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출신도 달랐고, 사고방식도 달랐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이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협동적 노력과 공동체의 책임의식 그리고 부의 공정한 분배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미국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오언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오언은 1829년 다시 돌아와서 가난을 퇴치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 수령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성공적으로 영위되지 못합니다. 오언은 더 이상 사회 개혁가로 살아갈 수 없었으며, 자신의 불행을 다스리기 위해 심령학에 심취합니다. 1839년에서 1845년까지 퀸스우드에서 네 번째의 마지막 공동체를 실험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1858년 오언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잃고, 고향인 뉴타운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그를 논평합니다. “오언이 자신의 공산주의의 이론을 제시했을 때, 모든 것은 180도로 돌변한다. 그의 사회적 개혁을 가로막던 세 가지 장애물은 사유 재산, 종교 그리고 전통적 결혼제도였다.” (Engels: 113)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