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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야나 헨젤의 '동쪽지역 아이들'

필자 (匹子) 2012. 6. 7. 10:56

친애하는 H, 오늘은 전환기 이후의 작품으로서 2002년에 약 35만부가 팔려나갔던 베스트셀러 소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스트셀러라면 으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수준 이하의 저질 문학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외의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품은 야나 헨젤 Jana Hensel의 『동쪽지역 아이들 Zonenkinder』입니다. 야나 헨젤은 1976년생으로서 라이프치히 출신입니다. 그미는 2002년의 시점에서 고찰할 때 13년을 구동독에서 살았고, 13년을 통일된 독일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미의 나이는 불과 13세였습니다. 통일이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아이에게 변화된 현실, 아니 변화되어야 했던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통일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동독 지역 사람들은 서독사람들에 의해 경멸당하곤 합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제 대부분 사람들이 과거의 삶, 특히 구동독의 과거 일상에 관하여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헨젤은 이 점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직접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하여 펜을 거머쥡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책이 바로 『동쪽지역 아이들』입니다.

 

 

 

 

 

주인공은 작가와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작품 속에서 그미는 과거 유년기의 삶을 추적해 나갑니다. 잃어버린 구동독의 삶의 풍경은 유년의 눈에 의해서 반사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살았던 유년의 삶의 장소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시스템 체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는 학교생활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교실에 붙어 있던 울브리히트와 호네커의 사진이 사라지고, 방과 후의 활동도 서독의 교육 방식으로 바뀝니다. 게다가 흔히 사용되던 단어 역시 순식간에 바뀌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용되던 표현은 사라지고, 서독에서 통용되는 단어들이 갑자기 어색하게 사용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상점을 지칭하던 “카우프할레 Kaufhalle”를 “슈퍼마켓”으로, “대중 체조”를 에어로빅으로, “몬도스 Mondos”를 “콘돔”으로 달리 표현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체험했던 모든 체험은 이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통독 이후에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저버리고, 서독사람의 모든 것을 모방하면서 살아갑니다. 구동독의 모든 질서는 깡그리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모두 서독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예컨대 의복, 식습관 그리고 취미 생활 등 모든 것은 서방 세계의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주인공의 존재는 서독의 젊은이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게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의 사항에 있었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동독의 시스템 가운데 그나마 좋은 점을 인지하고 이를 발설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구동독은 복지체계, 교육 제도 그리고 여성의 취업 등의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동독이 붕괴되면서, 장점이든 단점이든 간에 모든 시스템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은 기억 속에 깊숙이 은폐되어 있는 유년의 현실을 발설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쉽게 어느 나라 출신이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을 동독 출신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오시”임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껄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주인공과 동년배의 세대가 “우리라는 감정 Wir-Gefühl”을 지닐 수 없었음을 가장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점들을 작품 속에서 세밀하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야나 헨젤

 

친애하는 H, 유년의 사라진 현실은 기억의 박물관 속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기억의 박물관은 어떠한 이름도, 주소도 지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인공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박물관의 문을 서서히 열어봅니다. 박물관 속에는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체험의 파편들이 가득 모여 있습니다. 작가는 어떠한 비애 내지 동경의 시각을 배제한 채 이것들을 글로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작품 『동쪽지역 아이들』은 마치 수필처럼 간결하고도 솔직하게 기록된 체험기의 인상을 풍깁니다. 그 안에는 주인공의 과거 체험, 여성으로 살아간 어머니와 언니에 관한 에피소드 등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도 없고, 독자들을 자극할만한 짜릿한 연애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는 그저 일하면서 육아에 전념하는 여성들의 일상, 그리고 혼전 동거를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동독 여성들의 애정관 등이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 책이 출간과 함께 수십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작품이 동시대 젊은이들의 심리적 아픔, 해원 그리고 갈망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의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일단 하나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까 합니다. 2003년 초에 카이 비어만 Kai Biermann이라는 이름의 젊은 저널리스트는 베를린에서 야나 한젠과 인터뷰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 역시 구동독 출신으로서 슈투트가르트 신문의 문예란을 담당하는 기자로 활약 중이었습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급부상한 동년배 여성 작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 커피숍에서 야나 한젠은 서독의 니베아 Niver 크림 대신에 동독 제품, 플로레나를 가방에서 끄집어내어 얼굴에 발랐습니다. (베를린의 겨울 날씨는 워낙 변화불측하기 때문에, 얼굴관리를 소홀히 하면, 강한 바람 탓에 피부가 거칠어진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저널리스트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요즈음 그걸 바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말한 뒤에 그는 인터뷰를 생략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비로 이러한 해프닝이 발생한 뒤부터 야나 한젠은 자신의 크림을 가방에서 꺼내기가 어색하다고 말합니다.

 

친애하는 H, 문학 작품집 한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해당 작가는 반드시 찬란한 영광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성공이 오히려 작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요. 야나 한젠은 순식간에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작품은 포에지 앨범을 방불케 한다.” “주인공은 자기만족, 자기 합리화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역겹다.” “서독 작가라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그렇게 시시콜콜 서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불명료하고, 지독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몇몇 비평가들은 야나 헨젤을 “과거 극복의 문제에 해악을 끼치는 아마추어 작가”라고 분류하게 하였습니다.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들은 대부분 구동독 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야나 한젠의 작품을 비난하게 한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뒤이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이 “공동체의 우리라는 감정”에 대해서 적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야나 헨젤 역시 이러한 심리적 반응을 어느 정도 예견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거대한 적개심이 출현할지는 그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독 출신의 아이들이 갈구하는 것은 옷의 장신구에 담겨 있다.

 

나 헨젤의 작품 평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동쪽지역 아이들』동서독 사람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다는 점입니다. 가령 서독사람들은 작품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반면, 동독 출신의 사람들은 작품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볼트 출판사 Rowohlt Verlag의 편집자 알렉산더 페스트 Alexander Fest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는데, 이는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서독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개인주의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동독인들의 이질적인 삶에 대해 흥미를 드러낸 반면, 동독인들은 보편적 의미로서의 “우리”를 거론한다는 자체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H, 우리도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 출신의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될 것이고, 북한 출신의 독자가 이에 대해 논평할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반도의 경우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의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 하나는 지독한 반공주의의 입장으로서 북한 사회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는 그룹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사회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그룹입니다. 물론 우리는 나중에 한 인간의 삶의 행적이 어떠했는가? 하는 물음을 고려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다양하고 객관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 역시 추측컨대 이러한 두 그룹의 입장을 견지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구동독을 알고 싶지 않으며, 그냥 서방세계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서독 출신의 작가, 플로리안 일리스 Florian Illies (1971 - )는 2003년의 시점에 『골프 세대 Generation Golf』라는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80년대 서독에서 자라난 세대의 특성을 기술한 비문학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리스에 의하면 1965년에서 1975년 사이에 태어난 서독 젊은이들은 폴크스바겐 “골프” 세대라고 명명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지 않는 복지국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정치의식이 투철하지 않으며, 유행과 향락 문화 그리고 시장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작가는 “골프 세대”의 헛된 세계관 내지 사고방식 등을 신랄하게 풍자했지만, 서독과 동독의 젊은이들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독 야나 헨젤에게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미가 동독 출신의 여성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야나 헨젤은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해명하였습니다. 자신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과거의 편린을 글로써 재구성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도대체 13세의 소녀가 불법 국가에 관해서 무엇을 안단 말인가?” 하고 인신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미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작품에 기록된 것보다도 더 지적으로 사고합니다.” “사람들이 내 책을 읽고 나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나는 앞으로 더 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미는 2008년에 엘리자베트 레터 Elisabeth Raether와 공동 집필하여 『새로운 독일 동화들 Neue deutsche Märchen』을 발표하였고, 2009년에 『주의, 동독 지역. 왜 동독인들은 달리 머물러야 하는가? Achtung Zone. Warum wir Ostdeutschen anders bleiben sollte?』하는 에세이 문헌을 간행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문학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토프 디크만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야나 헨젤

 

 

그렇다면 야나 헨젤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작품을 집필하고 발표했을까요? 그미가 작가로서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우리는 그미에게서 작가의 마스크를 벗겨보기로 합시다. 그미는 78년생의 젊은 아가씨입니다. 아침에 게으름 피우며 늦잠자고 싶어 하며, 언젠가 1년간 미국에서 이국적인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그미는 대학이라는 보호 받은 공간에서 잠시 머물고 싶어 합니다. “엄마가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미의 거주지는 베를린의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역이며, 기분이 우울하면 맹렬하게 조깅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발랄한 여자입니다. 주로 패스트푸드로 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에 엄마의 걱정을 독차지하는 딸이기도 합니다. 사실 26세의 처녀가 엄마를 언급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그미는 자신의 소설을 엄마와 언니에게 헌정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의 비밀스러운 수취인은 어머니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쪽지역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수취인은 다름 아니라 야나 헨젤의 부모입니다. 그미는 동독이라는 가옥을 순식간에 걷어서 없애버린 이전 세대에 대해 고통스러운 어조로 항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나의 사랑스러운 방을 모조리 허물어버렸는가? 하고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젊은이로서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코스가 부모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쪽지역아이들”은 그러한 성인식의 기회를 한 번도 자발적으로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권위는 13년 전 며칠 사이에 순식간에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야나 헨젤이 이전세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왜 당신은 당시에 침묵으로 일관했는가요?”가 아니라, “왜 당신은 모든 것을 망각해야 한다고 믿었는가?”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작가의 동년배의 독자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대는 오로지 불법 국가라는 오명으로 인하여 당시 사회주의의 현실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을 자격을 지니고 있는가? 국가가 불법적이라고 해서 우리의 유년의 삶 역시 불법적인가? 우리의 잃어버린 유년의 삶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는가? 우리의 잃어버린 찬란한 유년은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은폐되지 말아야 하고, 무시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등의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애하는 H, 이와 관련하여 야나 한젠의 작품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순응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유년을 상실한 세대의 어떤 내밀한 동경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년의 꿈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깊은 심리적 위안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것이 과연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하고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야나 헨젤의 작품은 결국 동서독 사람들의 오해 내지 상호 불신을 제거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동독 수상 안젤라 메르켈 Angela Merkel도 언급한 바 있듯이 “서쪽의 대부분의 사람들, 즉 동쪽에 친척이나 친지가 없던 모든 사람들이 동독을 익명의 불법 국가로 여겼을 뿐, 그것 사람들의 개별적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작품은 그곳에서도 하나의 일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