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체호프의 세 자매

필자 (匹子) 2021. 7. 2. 11:56

인간의 행복은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에 의하면 만화경 속의 상과 같습니다. 혹은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무지개의 뒤를 쫓으면, 무지개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그 자체 아름답지만, 삶에서 모조리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꿈꾸며 살아갑니다. 꿈이 없다면, 인간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삭막할까요? 그렇지만 지나간 꿈이 허황된 것이라고 판단되면, 우리는 최소한 주어진 현실이 그러한 꿈에 근접하는 무엇으로 변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갈망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팽개칠 게 아니라, 거기서 최소한 어떤 가르침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꿈은 완전히 실현되는 무엇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어떤 부분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구체적인 유토피아의 참뜻입니다. 친애하는 K, 오늘은 안톤 체호프 (Anton P. Čechov, 1860 - 1904)의 작품에 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4막으로 이루어진 「세 자매 Tri Sestry」가 그것입니다. 이 작품은 1899년에서 1900년 사이에 완성되어, 1901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체호프의 동상

 

 

 

러시아의 어느 소도시에서 세 자매와 남동생 한 명이 살고 있습니다. 말이 소도시이지, 그곳은 삭막한 시골과 같습니다. 그들은 약 11년 전에 모스크바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장성이었던 아버지는 사건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자매 가운데 첫 번째인 올가 Ol'ga는 약 4년 전부터 여자 김나지움에서 선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인 마샤 Maša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쿨뤼긴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냉혹하고도 편협한 속물로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인 이리나 Irina는 지금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직업을 갈망합니다. 그미는 제 2막에서 전신 전화국의 직원으로 취직하고, 제 3막에서는 직장을 바꾸어 시청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리나는 제 4막에서는 교사 자격을 위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발령 받은 학교에 출근하려 하고 있습니다.

 

세 자매와 함께 사는 남동생의 이름은 안드레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강요한 대로 학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열심히 학문을 탐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 자매는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남동생이 그곳에서 교수가 되어, 함께 대도시에서 살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는 제 3막의 마지막 대목에서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안드레이는 이곳 출신의 처녀, 나타샤와 결혼하여, 그곳 시골에서 그냥 눌러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샤 역시 남편을 저버리고 감히 모스크바로 이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올가와 이리나 역시 거주지 그리고 직업의 문제로 인해서 모스크바로의 이주를 포기해야 합니다.

 

세 자매의 집을 방문하는 자들은 대체로 장교들입니다. 이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친분을 맺고 있던 터였습니다. 세 자매 가운데 올가는 무척 결혼하고 싶지만,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샤와 이리나의 경우는 다릅니다. 방문객 가운데에는 베르시닌 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샤를 맨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연정을 느꼈습니다. 베르시닌 대위는 불행한 기혼남이었습니다. 마샤 역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터라, 처음에는 베르시닌 대위에 동정심을 느낍니다. 대위에 대한 그미의 동병상린의 감정은 어느 순간에 사랑으로 변하게 되고, 유부남과 유부녀는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밖에 장교들 가운데 투첸바하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과 교양을 겸비한 남작인데, 이리나를 깊이 연모합니다. 투첸바하는 이리나의 영향으로 인하여 직업 군인으로서의 삶을 박차고, 벽돌 공장에서 일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이리나는 처음에는 미래의 성공을 애타게 갈망하던 터라, 투첸바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거대한 갈망이 실현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미는 투첸바흐와의 결혼을 결심합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세 자매의 사랑, 그들의 환상 그리고 행복에 대한 기대감 등은 깡그리 파괴되고 맙니다.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는 셈이지요. 첫째로 투첸바하는 결혼식 하루 전날 밤에 어느 장교의 결투 신청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결투를 벌이다가, 총에 맞아 즉사합니다.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리나와 함께 행복한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투의 당사자는 솔레뉘이라는 사내였습니다. 그는 심리적으로 하자를 지니고 있는 냉소적인 건달이었습니다. 솔레뉘이는 언젠가 이리나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의 고백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자에게 앙갚음하기 위하여 그미의 예비신랑을 죽인 사람이 바로 솔레뉘이였습니다. 둘째로 마샤는 결국 사랑하는 베르시닌 대위와 이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해 있던 러시아 수비대가 먼 곳으로 이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재회의 기약 없이 헤어지고 맙니다. 셋째로 세 자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올가는 항상 직장 생활에 억매여 있으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넷째로 안드레이는 처음에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억척스러운 시골여자였습니다. 성격이야 맞추어 살면 그만이지만, 하찮은 일에도 남편을 속이는 그미의 버릇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안드레이는 멍하게 지내거나 노름판에서 시간을 때웁니다. 결국 그는 빚을 갚으려고 집을 저당 잡힙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자신의 목표를 실현시킨 사람은 나타샤입니다. 그미는 세 자매를 그들의 집에서 쫓아내고 맙니다. 또한 나타샤는 무기력한 남편을 호령하면서 악착같이 살아갑니다. 나타샤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에게 더없이 갸륵한 정을 쏟습니다. 또한 그미는 어느 외간 남자와 몰래 만나 정을 통하곤 합니다. 그밖에 자신의 사적인 행복을 만끽하는 또 다른 주변인물이 있습니다. 안피사라는 하녀가 바로 그 주변인물입니다. 비록 그미는 좋은 남자를 사귀지는 못했지만, 궁핍함에 대한 걱정 없이 올가와 함께 김나지움의 국립 관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2004년 독일 기센 극장에서 공연된 '세 자매'의 배우들

 

 

 

흔히 사람들은 체호프의 연극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난하곤 합니다. 즉 극작품에는 “급작스런 행동이나 전개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극적인 긴장감이 없다.” 등의 비난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세 자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복합적인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게 오히려 극적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있으니까요. 마샤와 베르시닌, 이리나와 투첸바하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은 뒤엉켜 있습니다. 그밖에 나타샤가 겪는 결혼 생활, 육아, 혼외정사 대가족 내에서의 권력 다툼 등의 이야기는 너무 복잡하므로 관객에게 어떤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킬 정도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극작품 대신에 장편 소설로 형상화되어야 마땅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체호프의 작품은 20세기 초 러시아 시골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갈망 및 그들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비록 사건의 진행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더라도 극작가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놀라운 결말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행복의 가능성에 관한 물음입니다. 과연 인류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과연 우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문제는 작품 내에서 마샤와 베르시닌 사이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만, 작품 전체에 대한 작가의 구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작품의 주제는 작품의 배경으로서 도시와 시골의 차이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가령 등장인물이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전근대적인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억척 여성인 나타샤, 자신의 세계에 안주해 있는 편협한 속물, 쿨뤼긴, 삶에서 오로지 쾌락만을 최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프로토포프 (나타샤의 애인) 등이 이러한 부류에 해당합니다. 이를 고려할 때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안드레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문화적으로 낙후한 시골에 그냥 주저앉은 게으른 패배자입니다. 이로 인하여 안드레이는 내적으로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4막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섬세한 감정과 품위를 잃지 않는 누이들을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누이들은 더러운 환경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면서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를 고려할 때 작품의 제목이 “네 남매”가 아니라 “세 자매”로 정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가령 세 자매는 문화적 교양과 기품을 지닌,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리고 투첸바하와 (약간 아이러니한 성격을 지닌) 베르시닌 역시 교양을 지닌 문화인에 해당하지요. 투첸바하가 사망하고, 베르시닌이 시골의 소도시를 떠나게 되었을 때, 세 자매는 어떤 절망감을 느낍니다. 나타샤의 간계로 그미에게 오랫동안 보존해온 그들의 집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의 고통을 생각해 보세요. 세 자매는 결국에 이르러 모스크바로 향하려는 꿈을 완전히 접고 체념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마냥 주저앉아 있으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가는 교사로 일하고, 이리나 역시 교사로 발령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교육하는 행위는 상징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성서에 이르기를 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였습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그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먼 훗날 낙후한 시골의 문화적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게 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