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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라인하르트 이르글의 '미완성의 사람들' (4)

필자 (匹子) 2021. 6. 3. 10:50

친애하는 J, 그렇다면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소설의 제목, “미완성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나 그리고 그미의 아들 라이너는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완성하지 못했을까요? 첫째로 아나와 라이너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그들의 사랑의 삶에서 불행했으며, 직업적인 삶에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둘째로 특히 라이너는 사회적으로 방관자로 살아야 했으며, 아내도, 친구도, 자식도 없이 암으로 사망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는 동거녀가 있습니다만, 그미와 결혼할 생각은커녕, 자식을 낳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일단 아나의 경우를 언급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J, 소설을 읽으면서 다음의 사항을 간파하게 됩니다. 즉 아나의 삶의 체험은 아들인 라이너의 삶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항 말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불행이 행운으로 역전되는 경우는 아마 드문가봅니다. 자신과 부모의 관계가 한 인간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나의 모골을 오싹하게 만듭니다. 아나는 세계대전 직후에 남자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이에 대한 끔찍한 체험은 이후에 그미가 자연스럽게 이성교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아나는 그미의 어머니, 하나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난리 통에 자신을 버려두고 이모와 엄마만 데리고 독일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족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하나의 철칙으로 삼는 여인이 말입니다. 사실 하나의 가족관은 작품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데 (9쪽, 10쪽, 20쪽, 150쪽), 이는 힘든 시기에는 가족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도록 작용하지만, 평화기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나는 어머니가 언제나 고향인 코모타를 동경하는 것을 하나의 감상적인 동경에 불과하다고 매도합니다.

 

친애하는 J, 대부분 독일인들이 독립적이지만, 아나는 유달리 독립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어머니의 태도에 대한 반발 욕구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하나는 자식의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간섭합니다. 혹자는 이를 애정에서 비롯한 지나친 관심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미는 어머니를 증오하였고, 어떻게 해서든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 간에 출생지, 출신 그리고 조상 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습니다. 아나는 통역사가 되어서 직장생활을 영위해야 하지만, 그미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나는 아들의 보육을 위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합법적이지 못한 가족 관계는 구동독 내의 직장에서 승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미혼 여자가 사생아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독일에서는 사생활로 취급되므로 하자로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국가 기관, 그것도 높은 자리의 공무원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아나가 동독 내에서 “독일 민족 민주당 NDPD”에서 경력을 쌓아 고위 정치가가 되려는 노력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나는 아들이 어렸을 때, 라이너를 하나에게 맡기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아들을 영원히 할머니의 품에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미는 아들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와서 함께 살다가 귄터라는 남자와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에게서도 어떤 참된 사랑은커녕 작은 위안도 얻지 못했습니다. 자고로 인간의 결혼생활은 다른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이라고 정의를 내리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려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즉 “인간의 결혼생활은 대체로 남편 내지 아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과 동고동락하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책에서 베낀 게 아니라, 서로박의 고유한 주장입니다.^^) 아나가 겪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은 그미의 사랑의 삶에 언제나 악재로 작용하였습니다. 작품에는 아나가 도로 한복판에서 실신하여 쓰러지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아나의 순간적인 쓰러짐은 그미의 “내면에 도사린 가족들과의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어떤 개방된 폐허”라는 것입니다. (242쪽)

 

이번에는 라이너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라이너는 아버지 없이 자랐습니다. 친아버지인 에리히는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서독으로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약 5년간 양부인 귄터와 함께 살기도 하였습니다. 귄터가 아버지 노릇을 한답시고 사회주의 통일당의 강령을 언급하면서 시시콜콜 간섭하는 등 주인공을 귀찮게 했지만, 그는 아버지로서의 굳건한 버팀목은 되지 못했습니다. 라이너는 누구보다도 아나, 즉 어머니를 증오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엄마들을 잊어야 해.”하고 토로할 정도입니다. (242쪽) 라이너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비르크하임에서 살던 세 여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애정이 남달랐다고 술회합니다. 라이너는 유년시절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이모와 함께 지낸 유년을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회고합니다. 그렇기에 라이너는 어머니와 함께 보낸 베를린에서의 청년기를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작품이 라이너의 유년기에 관해서 많은 부분 할애하여 세부적으로 묘사하지만, 정작 청년기 내지 성장 과정에 관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마치 세 여인이 고향인 코모타로부터 “추방”되었듯이, 주인공인 라이너는 아름다운 추억이 어려 있는 소도시 비르크하임으로부터 베를린으로 “추방”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베를린으로 이사온 뒤부터 라이너는 외톨이로 고립되어 자랐습니다. 친구 없이 살다보니 한 곳에 몰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독서였습니다. 고독한 청년이 돌파구를 찾는 곳은 바로 문학이었던 것입니다. 문학 작품 속에는 허구의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독서 버릇을 지닌 데에는 증조할머니 요한나 그리고 할머니 하나의 영향이 컸습니다. 라이너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자신의 살게 했던 동력은 “겪어보지 못한 삶에 대한 거대한 탐욕, 발바닥 아래에 도사린 소리.”라는 것입니다. (165쪽) 이러한 탐욕은 결국 모든 의도를 미완성으로 남게 하고 어떤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게 만듭니다. 라이너는 전환기 이후에 지긋지긋한 치과의사의 일을 때려치우고 서점을 개업합니다. 동거녀가 이를 반대해도 그의 창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인공이 “책을 급박하게 읽으려는 욕구 Lesehast durch Buecher”로 인하여 중요한 다른 면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그에게는 어떠한 진정한 친구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일에 골몰하며 살았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이라든가, 정치에 참여하여 공동의 욕구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적극성은 주인공에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구동독의 정치 시스템이 개개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가로막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라이너는 사회의 방관자로 살아왔습니다. 이는 그가 지나간 여정 속에서 단 한 번도 어떤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방관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 2부의 제목인 “유리 아래”라는 표현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주인공들 역시도 사회적 삶의 주인으로서 떳떳이 살지 못하고, 그저 동구에서 추방되어 이주해온 이방인으로 살아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증인 내지는 목격자로 살아온 사람들은 사회의 근본 문제에 대해 그저 회피하는 자세로 일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하나가 맨 처음 비르크하임에서 집을 구할 때 집주인여자와 커다란 마찰을 빚었습니다. 집주인여자는 하나 가족들을 동구에서 이주해온 뜨내기들로 취급하며 집을 세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갈등을 “수백만 년 이어온 적개심”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제는 라이너의 가족들은 이방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를 수정하도록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 앞에 주어진 의무만 다하고 살아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이별” 그리고 “의무감”을 가리킵니다. 라이너의 가족들은 원치 않는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자발적 욕구와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실천하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가는 동독 초기의 사회주의 재건을 “파괴된 부분을 그저 조금 채색하는 노력”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빗자루 & 밀물과 같은 마력적인 단어를 잊지 마. 태양 아래에는 새로운 것은 없어. 역사의 흔적은 모조리 항상 같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어.” (84 쪽).

 

친애하는 J, 20세기의 유럽 문학은 고통당하고 고향을 상실한 유대인들의 삶을 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르글은 타국에서 살아가던 독일인들의 강제 추방을 문학적 소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과 이전 세대의 실제 삶에 근거한 것입니다. 물론 이르글이 반유대주의자도 아니고, 인종적 편견을 지닌 작가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인도 추방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소설적 주제의 독창성을 지니며, 현재 독일인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종적 편견은 하나의 허상으로서 주어진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이 세상에는 땅 주인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으면 누구나 맨손으로 세상을 하직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영국의 농민반란 지도자인 존 볼 John Ball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땅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나, 그 열매는 만인의 것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