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블로흐: 미하엘 콜하스

필자 (匹子) 2020. 3. 24. 11:46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만큼이나 규범적인 인간, 미하엘 콜하스 Michael Kohlaas이다. 

 

기존하는 법 조항 하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마치 벌겋게 타오르는 불처럼 작열한다. 거기에는 마치 신의 법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하나의 법조항을 따르기 위해서 마치 반역자처럼 무력의 투쟁에 깊이 개입하는 자는 오로지 미하엘 콜하스밖에 없다. 법조항은 그의 뇌리에는 자연법, 아니 자연법의 찬란한 광채로 투영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 기사에 관한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인 학습소설이 탄생하게 된다. 법적 감정에 도취하여 법 규정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는 기사 말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한 남자가 자신의 손해에 고통을 느끼다가 얼마나 광포하고 끔찍하게 행동하는가? 하는 물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트론카 출신의 어느 귀족에게 잘 키운 두 마리의 흑마 (黒馬)를 저당 잡힌다. 몇 주일 후에 그는 애지중지하던 수컷 두 마리 대신에 폭삭 늙고 병든 암말 두마리를 돌려받게 된다. 귀족의 처사는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강도의 소굴, 트롱카 성 (城)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왕궁은 봉건적 경제구조에 지배당하고 있다. 귀족과 제후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서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다. 콜하스가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모든 귀족들은 비아냥거리며 그의 요구사항을 처음부터 묵살해버린다. 법은 주인공에 의하면 “황금으로 이루어진 천칭에 비유될” 정도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인공은 법이 기본적으로 파괴되어 있는 상황 때문에 고통과 번민으로 시간을 보낸다. 콜하스는 끝내 강도의 수장이 되어, 법정의 이름으로 방화와 살인을 일삼는다.

 

루돌프 폰 예링 Ihering은 그의 책 『권리를 위한 투쟁 Kampf ums Recht』에서 콜하스를 “법의 순교자”라고 규정하면서 주인공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여기서 예링은 어떤 또 다른 완고한 인간형을 칭송했는데, 그는 다름 아니라 저자인 셰익스피어조차도 조소한 바 있는 샤일록이라는 인물이다. 자유주의의 지조를 지닌 법률가, 예링은 샤일록을 (자신의 사적인 이득을 요구할 뿐 아니라) 법의 실천을 요구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베니스의 상인」에서 재판관으로 등장하는 포르시아는 “현명한 다니엘”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만 포르시아의 법정은 마치 콜하스에게 해악을 가하는 족벌 중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재판의 판결은 예링에 의하면 “가련한 책략이자, 사실 곡해의 모략”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재판관이 피고의 살아있는 몸에서 1파운드의 살을 떼 내겠다는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조처하는 경우 말이다.

 

이러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판결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예컨대 어느 판사가 지역권 地役権을 지닌 자에게 권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토지에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토지에 발을 디디는 것은 지역권을 설정하는 계약에서 유보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샤일록은 예링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중세의 유형적인 유대인을 대변하는 샤일록은 주어진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천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헛되이 외친다.”는 것이다. 샤일록의 외침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로운 왕궁 극장에서 한 번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면모는 기괴할 정도로 부도덕하게 묘사되어 있고, 1파운드의 살을 조건으로 내세운 계약이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피 한 방울 흘리는 경우와 자신의 토지에 발을 디디는 경우는 서로 비교될 수 없다. 게다가 샤일록을 법의 순교자, 콜하스와 비교하는 것도 전혀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샤일록은 오로지 증오심 때문에 1파운드의 살덩이를 계약 조건으로 내세웠다. 만약 샤일록이 자신의 권리를 찾게 되면, 다시 말해 안토니오의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 점의 살덩이를 때내게 된다면, 그는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에 비하면 콜하스는 자신의 결코 이중적일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현실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범죄자로 돌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극과 클라이스트의 반역자 소설 사이의 차이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에는 어떤 진지한 주제가 부분적으로 담겨 있으며, 「미하엘 콜하스」의 사건이 처음에는 무척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말이다.

 

콜하스는 법 그리고 법을 관장하는 자들로부터 상처입고 외면당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말해 법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세상의 평화로움을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열정을 부추긴, 분명히 드러난 내용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법,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사소한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말장수가 숙지하고 있는 통상적인 저당에 관한 개인의 고유한 권리에 관한 문제 말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격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광적 상태로 커지게 되는데, 그 역시 이를 처음부터 예견한 것은 아니었다. 확신에 찬 행동은 거대한 양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확고부동한 결단에서 비롯한 생각은 터무니없는 오해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반역적으로 행동하는 곳에서 주인공은 비참한 상황을 인지하면서 신적 존재를 모독하는 짓거리를 저지른다.

 

 

 

샤일록과 제시카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결코 간과할 수 있다. 즉 소설 속에서 주어진 비참한 현실 속의 지엽적인 내용이 잘 투시되고 있다는 사항 말이다. 주인공의 끈덕진 행위 그리고 주인공이 유효하게 활용하려는 법적 규정은 서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불균형은 현실 속의 지엽적인 내용으로 인하여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화의 가치에 대해서 법적으로 보장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법적인 보증에 관한 사항은 푸펜도르프 Pufendorf와 볼프 Wolff가 통상적으로 자연법으로부터 추출해낸 사적 재산권문제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나중에는 재화 뿐 아니라, 정의로움에 대한 추상적인 의식을 쟁취해내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기이하게 신을 모독할 정도로 과장스럽게 행동하고, 불평불만 때문에 과감하게 행동하고, 급기야는 맹목적으로 광포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맨 처음 주인공이 처한 저당에 관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고찰할 때- 언제나 내용 없는 어떤 법에 관한 의식을 대리하는 지엽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겉으로 드러난 공통적인 사항만을 가지고 콜하스와 샤일록을 서로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주인공이 추구하는 방향을 중시한다면, 미하엘 콜하스는 얼마든지 돈키호테와 비교될 수 있다. 그렇지만 콜하스는 돈키호테처럼 지나간 이상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법은 법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동일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약간 변색되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둔탁할 정도로 숭고한 동일성 말이다. 돈키호테는 주어진 현실에 온존하는 제반 장치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야말로 낭만주의적으로 투쟁한다. 그에 비하면 콜하스는 어떤 기존하는 법적 규정에 매달리면서, 그야말로 추상적으로 투쟁한다.

 

돈키호테의 기사도는 직접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비록 시간적으로 지나간 것처럼 비치지만, 기사의 환상 내지 기독교에서 파생된 변종 기독교주의를 가리킨다. 미하엘 콜하스의 법에 관한 꿈 역시 직접적인 내용과 관계되고 있다. 이것은 가령 당시에 고리대금업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시민들의 채권법 제 1219 - 1221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법 규정을 가리킨다. 그밖에 콜하스가 추구하던 무엇은 추상적 법의식의 핵심 사항으로서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에 의거하고 있다. 즉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기본 원칙 말이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다음의 사항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돈키호테가 관여하던 직접적인 내용 뿐 아니라, 돈키호테가 추구한 이상은 미하엘 콜하스가 관여하던 내용 그리고 그의 이상보다도 훨씬 강력하다는 사항 말이다. 그렇지만 콜하스의 행동은 돈키호테의 그것에 비해 더욱 강인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하엘 콜하스는 용기 있는 바보가 아니라, 당시대의 법을 준수하려고 역모를 저지르는 반역자에 해당한다. 그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돈키호테와 콜하스는 제각기 다른 이유에서 서슴지 않고 과장된 행동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돈키호테가 시대착오적으로 행동하는 낭만주의 기사라면, 미하엘 콜하스는 너무 일찍 세상에 태어난 역설적인 자코뱅주의자이다. 16세기의 시기로 돌아가서 추상적 엄숙주의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미하엘 콜하스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행동하는 법 이론의 칸트와 같다고 말이다.

 

돈키호테는 법에 대한 추상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시민주의의 도덕적 엄숙함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돈키호테의 광기는 다음과 같은 사항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그는 (거의 우연에 의해서) 어떤 냉담한, 결코 반봉건적이지 않는 실정법이 도사린 현실에다가 자신의 법적인 이상을 마구잡이로 적용하려고 했다. 역사적인 콜하스 역시 설정법이 마치 자연법이라도 되는 듯이 그에 대해 반응하였다. 콜하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1540년 전후였는데, 이때는 독일 농민혁명의 기운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당권을 굴욕적으로 박탈당하는 사건은 사람들에게 결코 혁명적인 슬로건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장수인 미하엘 콜하스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시대착오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실정법이 상처 입는 경우를 통해서 반역 행위가 자행되는 사건은 우리의 역사에서 자주 발생하곤 한다. 법의 척도 자체가 바르고, 혁명의 명분이 나름대로 어떤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법 자체가 우리에게 자연법적 이상을 분명하게 비춰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법 규정이 -설령 실정법이라 하더라도- 손상된 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경우 법 자체는 모든 불법, 참을 수 없는 억압 등을 분명하게 비추어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미하엘 콜하스는 결코 신을 모독하는 자가 아니었다. 콜하스가 단순히 저당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귀족 한사람을 호되게 꾸짖기 위해서 귀족의 성 城에다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순간 그는 고위층 계급의 불법 그리고 억압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이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