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박설호: (2) D학점과 신춘문예

필자 (匹子) 2025. 6. 21. 11:32

(앞에서 계속됩니다.)

 

6. 처음 낙방할 무렵에는 무능한 자신이 못내 미웠습니다. 그러다 낙방에 주눅들 무렵에는 (얼씨구?) 무고한 심사위원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심사하는 동안 수천 편을 읽으려면, 편당 몇 분이 소요될까? 심사위원의 심사 기간은 대충 4일 정도 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잡아 5,000분, 읽어야 할 작품이 2,000편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읽는 데에만 편당 2분이 소요됩니다. 그러니 심사위원들은 마치 우체국 직원처럼 우편물을 분류하는 데 골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시적 주제보다도 미사여구 내지는 꾸밈말로 모든 걸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열 번 이상 떨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모든 과정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거대 마트의 경품 행사에서 당첨되는 사람들은 주로 마트의 사장과 직원의 가족들이 태반이 아닌가요?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될 확률은 800만 분의 1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망설이곤 했습니다. 용렬스러웠던 나는 그만큼 고개 숙인 나락으로 성숙하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7. 물론 결선에 올라가 두 번 낙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령 나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체험했습니다. 1977년 신문사에 원고를 보낸 뒤 나는 신춘문예를 까마득히 잊은 채 군대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당시 눈이 나쁜 관계로 방위병 근무를 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무려 12주 동안 훈련해야 했습니다. 1월 초 군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받던 박태일 시인이 내가 근무하는 중대 본부로 엽서 한 장을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박 형, 훈련소 간이 변소에서 밑씻개 삼아 신문 조각을 찢어 들었소. 형의 이름이 낙선자 명단에 적혀 있더군요.”.

 

1977년 1월 1일자 한국일보에는 김남조 시인의 다음과 같은 심사평이 실려 있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박몽구와 박설호의 시는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박태일 시인은 불과 1년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혜성 같은 신인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낙방한 문우를 격려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부대의 중대장에게 곤욕을 치른 것을 기억하면, 지금도 아찔한 느낌이 듭니다.

 

8. 대학에서 근무하게 된 다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동료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서랍 속에는 미발표 시편들이 마치 시집가지 않은 딸년들처럼 나를 째려보며 원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만, 뒤늦게 오래된 시편들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신명 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고로 수십 년 낡은 사진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에는 과거의 모습에 미소가 만연한 법인데, 오래된 시편은 당사자에게 오히려 어떤 겸연쩍음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게다가 우리 앞에 서성거리는 미발표 작품은 끊임없이 수정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요? 작품은 자신의 설익은 감성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으므로, 항상 고칠 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마다 옷깃을 여미면서, “나의 시는 나의 사리(舎利)”라고 자신을 다독거렸습니다. 이로써 끊어질 듯 말 듯 나의 글쓰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9. 물론 결과론이지만, 스무 번의 낙방이 내게 하나의 보약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설익은 에스키스를 성급하게 공개하지 않은 것도 다행입니다. 인간 동물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입니다. 나의 저서 가운데 『실패가 우리를 가르친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 실패할지언정 포기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나는 한 마리 매미의 영혼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애벌레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언젠가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와, 열흘동안 찬란히 하늘을 나는 매미, 그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신춘문예는 내 집필의 스파링 장소, 즉 링이었습니다. 신문사는 해마다 나에게 수없이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것은 나의 수련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실력을 쌓기 위한 전지훈련”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신춘문예는 나에게는 설익은 에스키스를 만들게 한 창작의 가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도공(陶工)은 제 능력이 부족한 줄 모르고 언제나 가마를 탓하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도공의 실력은 아마도 조금씩 향상되었을 것입니다

 

10. 돌이켜보면 낙방에 대한 회한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지 않았던가요? 제자를 키우고 그들을 등단시키는 게 나의 임무가 아니던가요?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대로 인간은 성공을 갈구해야 하지, 실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쓰라린 실패는 우리에게 작은 교훈을 안겨줍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필자는 훌륭한 선생은 못 되나, 결코 엉터리는 아니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내 앞에 나타나 강의가 신통치 않다고 항의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시험의 점수는 배움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수행 평가일 뿐, 자신의 근본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시험을 마치 하나의 결과로 생각하고 여기에 목을 매는 태도, 합격이 능사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시험으로 평가하려는 사회의 통념은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락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지 않습니다. 당선과 탈락은 타자에 의해 결정될 뿐이지요. 자고로 추락하는 자에게는 날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날아올라 추락하는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운전면허 시험에 자주 떨어진 사람이 나중에 교통사고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D 학점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