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서로박: 정치 치료, 몽니와 확증편향은 어떻게 극복 가능할까?

필자 (匹子) 2025. 6. 6. 10:11

 

1. 인간의 의식은 마치 주인에게 꼬리치고 낯선 사람에게 짖어대는 개의 보수적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윤노빈) 낯선 무엇은 경계의 대상이고 익숙하고 일상적인 사항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줍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새로움을 두려워하며, 폐쇄적 공간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것은 언제나 낯선 무엇이며, 새로운 무엇입니다. 원론적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이에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익숙하고 통상적인 무엇을 연속적으로 의심해나가야 합니다.

 

2. 대선이 끝났습니다. 김문수 후보는 국민의 힘 당사 앞에서 대선의 패배를 공표하였습니다. 이때 일부 지지자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어째서 불복하지 않느냐고 그에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거 관리가 조작되어, 잘못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극우파의 분노는 “대선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라고 하는 이른바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에서 비롯한 억측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추측을 하나의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필자는 그들의 확증편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몽니, “옹고집Renitenz”과 같은 병적인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3. 확증편향 내지는 인지 부조화의 심리구조는 주로 파시스트들에게서 엿보이는 증상입니다. 그것은 서울 서부 지방 법원에서 난동을 부린 자들의 폭동을 부추긴 무지막지한 몽니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극우파 사람들은 상대방의 반론을 수긍하지 못하고, 이를 처음부터 거부합니다. 물론 유럽의 좌파 테러리스트에게서도 그러한 완강한 심리구조가 엿보입니다. 수구 세력은 상대방의 입장을 부정하다가, 급기야는 그들을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자는 악마이며, 무력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4.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항을 전해줍니다. 정적(政敵)을 살아있는 괴물 내지는 철천지원수로 규정하고 폭력을 불사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집단 중심의 사회주의자들"입니다. 바꾸어 말해 그들은 “국가 사회주의자”들, 즉 나치들이었으며, 소련에서 암약하던 “통속 사회주의자Vulgärsozialist”들 역시 전체적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개인은 없으며, 마치 노예처럼 당이 시키는 바대로 행동합니다. 불신과 대립을 정당화하고, 흑과 백을 둘로 쪼개며,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자가 바로 파시스트들이며, 집단 중심의 사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관용과 용서, 화합과 타협은 현실적 터전을 상실하게 됩니다.

 

5. 악마(diabolos)는 관용을 알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지적하며, 온갖 추문과 낭설을 퍼뜨리는 자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한국 사회에서도 암약하고 있습니다. 아니, 암약하는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활동합니다. 이들의 겉모습은 (1) 수구 보수언론, (2) JMS와 같은 사이비 종교 집단, (3) 유튜브 알고리즘 등을 통해서 절반의 그럴듯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세력은 사회적 수직구도를 용인하고, 그것을 하나의 평화적 질서라고 강변합니다. 이로써 계층의 차이는 권위주의의 도덕과 윤리에 의해서 정당화됩니다.

 

6. 인간의 몸, 심리 그리고 사고는 외부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는 나쁘게 말하면 신체적인, 심리적인  전염 내지는 사상적인 감염(感染)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거짓을 말할 때 우리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끊임없이 주장할 때, 우리는 “과연 그럴까?”하고 잠깐 의혹을 품습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없다고, 같은 거짓말을 수없이 듣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서서히 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권위적인 단체로부터 거짓말을 수없이 접하게 되면, 우리는 세뇌당합니다. 마치 우리의 몸이 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사고 역시 백 마리의 까마귀 속에서 백조의 흰색을 상실하게 됩니다.

 

7. 이번 선거에서 놀라운 점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인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물론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 사람 가운데에는 전통을 준수하고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공명정대한 분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 대다수가 계엄이라는 비상사태를 옹호하는 대통령 후보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입니다. 보수 골통은 나라가 풍비박산될지라도, 국민의 힘을 지지하겠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보다도 편가르기에 몰두합니다. 일차적으로 특정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자를 붉은 악마로 규정하려는 마음가짐 속에는 확증편향이라는 병적 증세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8. 집단 중심의 사회주의는 개개인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파시스트와 통속 사회주의자들이 활용하는 방식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망령으로서 개개인들을 인형극의 등장인물로 활용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가 납치되었다는 거짓말에 현혹당해서 오랜 기간 목숨을 바쳐서 싸웠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헬레나를 되찾아야 한다는 인지 부조화의 망령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수구 언론, 일부 종교 집단 그리고 극우 유튜브의 알고리즘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흑색선전에 가스라이팅 당해서, 겉으로 드러난 몇몇 사실만으로 거짓 진리를 수용합니다. 이로써 “새로움은 거부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기막힌 백래시 현상이 태동하게 됩니다.

 

9. “굥석열의 가장 큰 단점은 지지자들이 정신병자라는 데 있다.” (변희재). 극우 유튜브는 음모론을 퍼뜨려, 수구 세력의 의식을 흐리게 만듭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를테면 부정 선거 의혹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굥석열 역시 이러한 음모론에 세뇌당해서 계엄령을 통해서 영구 집권을 노렸습니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 지지자들이 이유 없는 적개심, 몽니 그리고 옹고집을 떨치고 자신의 고유한 사고의 자유를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여기에는 타인이 개입하여 치유의 길을 가르쳐줄 방법은 없습니다. 확증 편향의 경우 오로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10. 그러나 제삼자는 최소한 어떤 고유한 깨달음의 계기를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갇힌 공간, 거짓의 소굴에서 벗어나기, 폐쇄적 단체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근시안적 사고는 비판적 거리감의 결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익숙한 공간 (단골손님의 식탁, 일상적 모임, 아는 사람의 단체 등)을 떠나, 먼 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문제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 경우 세계 역사가 많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주어진 사안에 대해 비판적 거리감을 취해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억압과 폭력, 거짓이 난무하는 파라오의 이집트를 떠나 어떤 새로운 축복받은 나라를 찾아갔듯이, 우리는 위선과 허구로 가득 차 있는 (플라톤의 국가 제 10장에 서술되어 있는) 동굴에서 노예의 신분을 박차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11. 키르케고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De omnibus dubitandum”고 일갈했으며, 마르크스는 이를 다른 식으로 인용했습니다. 어쩌면 인간 삶 자체가 무지와 편협성을 떨치고 우상을 파괴하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잘못과 결함 그리고 착각을 바로잡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철학 행위는 망치 두드리는 일이다.”라고 천명했습니다. 올바른 사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고 다듬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자기 객관화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아의 존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그것을 하나의 다른 존재로 투시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나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하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의 견해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카멜레온처럼 살지는 말아야 하겠지요. 자유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지와 편견이라는 질곡에서 해방을 맞이한 분입니다.

 

감사드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