샨도르 페퇴피 (1823 - 1849)는 2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요절한 헝가리 출신의 혁명 시인입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과 인간 평등을 위해서 1848년 전쟁에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영국의 바이런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페퇴피는 불과 26년의 짤막한 삶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무려 800편이나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헝가리 사람들은 그의 시를 지금도 애송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헝가리 사람들은 샨도르 페퇴피의 자유로운 정신과 아름다운 문체에 감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독일 인종과 슬라브 인종 사이에서 언제나 핍박당하고 살아온 역사적 슬픔, 2. 그들 고유의 결코 잊힐 수 없는 보헤미안 문화에 대한 애착, 3.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그들 고유의 정체성 등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헝가리어는 핀란드어와 마찬가지로 인도 게르만어에 속하지 않고, 우랄어 계열에 속합니다. 그의 페퇴피의 문학은 포에지와 일상의 언어를 유연하게 결합함으로써 시인과 민족 사이의 교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의 삶의 궤적, 즉 해적이 자체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전해줍니다. 그의 부모님은 시민 사회의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상인이었습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수많은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이었던 샨도르에게 커다란 기대감을 지녔으며, 생활이 어려워도 어떻게 해서든 공부하여 전도유망한 직업을 지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페퇴피는 일찍 문학상을 받았는데, 성(姓)을 아예 페퇴피로 바꿉니다. (원래 그의 성은 “페트로비치Petrovics”였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으며,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역시 여러 학교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샨도르가 17세 때 학교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였고, 그 길로 페퇴피는 가출하게 됩니다. 일단 2년 동안 군복무를 하려고 했으나, 신체가 병약하여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1841년부터 샨도르는 유랑 극단과 함께 여러 지역을 방황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심리적으로는 편안하여, 이 시기에 많은 시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샨도르 페퇴피는 1843년에 부다페스트에 정주하였습니다. 이듬해에 주간지 『페스트 유행 주보Pesti Divatlop』의 부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에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은 헝가리의 유명 시인 미할리 뵈뢰스마티 (Michály Vörösmarty, 1800 – 1855)였습니다. 샨도르 페퇴피는 친구인 시인, 야노스 아라니 (János Arany, 1817 – 1882)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부하면서, 그의 작품을 헝가리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에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시집은 민중의 언어로써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면서, 시인의 사명 등을 문학적으로 타진하고 있습니다. 페퇴피는 특히 일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일상어를 민요풍으로 수용하여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토속적인 시어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으며, 자연 친화적 안온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이후에 나타난 격정적이고 직설적인 발언과는 약간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샨도르 페퇴피는 1845년에서 1846년 사이에 세 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습니다. 『진주 같은 사랑』, 『구름』, 『9월 말』이 그것들입니다. 1844년에서 1847년 사이에 탄생한 페퇴피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846년 가을에 샨도르 페퇴피는 트란실바니아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연인, 율리아 첸드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미는 특히 문학 작품의 가치를 예리하게 간파하는 혜안을 지닌,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율리아 첸드리의 아버지는 직업도 변변찮은 방랑자를 사윗감으로 용납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1847년 8월 8일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샨도르 페퇴피는 헝가리 독립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다가 1849년 7월에 코사크군과 헝가리 민병대 사이에서 벌어진 세게스바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시인의 시신은 전장의 폐허에서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율리아 첸드리는 마르파드 호르바트라는 역사학자를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850년 7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율리아 첸드리는 두 번째 결혼 생활에서 몹시 불행했다고 합니다. 그미가 의탁한 것은 글쓰기였습니다. 율리아 첸드리는 특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번역했는데, 그미가 번역한 안데르센 동화집은 오늘날에도 헝가리에서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샨도르 페퇴피의 아들, 졸탄은 아버지 없이 자라다가, 자신도 아버지처럼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습작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모이라 여신은 착하고 어진 젊은이를 저세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졸탄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스스로 시인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1870년 22세의 나이에 안타깝게도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참고 문헌
- 샨도르 페퇴피 시집: 민족의 노래, 한경민 역, HUEBOOKS 2023.
- 한경민: 헝가리 문학사, 한국외대 출판부 2004.
- Sandor Petoefi: Gedichte, 1842 – 1843, Frankfurt a. M. 2013.
- Sandor Petoefi: Dalaim; anthológia Petöfi Sándor legszebb költeményeiböl, Budape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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