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박설호: (1) '시 작품은 상처 치유의 연고다.'

필자 (匹子) 2024. 9. 7. 10:17

아래의 글은 창작 21, 2024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1. 들어가는 말씀

 

凸: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고르신 시들은 중세, 바로크 시대, 19세기 초, 20세기 초에 발표된 것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인들의 연애관이 약간의 시대적 편차를 보여줍니다.

凹:: 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직업과 결부된 계층 차이는 천부적인 것으로 확정되어 있었지만, 남녀 차별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존재는 중세 이후로 천시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사고하는 주체”가 아니라, “아름다운 객체”로 취급되었습니다.

 

凸:: 그것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凹:: 성을 억압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이 큽니다. 죄악이 “바빌론의 창녀”로 상징화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의 도래 후에, 여성의 자유는 현격히 축소되었습니다. 여성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파생된 부속물로 여겨졌으며, 일부일처제의 가정 제도의 규율이 여성의 자유를 옥죄여 왔습니다. 오랫동안 여성작가가 출현하지 않은 것은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대 후기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여성작가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성들의 평균적인 지적 능력과는 상관이 없는, 성차별의 기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凸: 선생님이 선택한 시작품들은 시대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여성과 여성 운동의 변화 과정을 의식한 것이겠지요?

凹: 예리한 지적이로군요.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여성들은 문학 작품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아예 발표할 수 있는 지면조차 허용되지 않았지요.

凸: 어디 여성 시인들만 그런 식으로 당했을까요? 근대는 영리한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서 처형하던 시대였지요.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앤 콘웨이의 문헌은 익명으로 간행되었지만, 나중에 라이프니츠의 단자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凹:: 네, 대부분 여성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편의 하인으로 살았지요. 18세기부터 여성들은 서서히 남성과 동등한 권한을 조금씩 획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섯 작품을 통하여 다음의 사항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사랑의 열정은 역설적으로 갇힌 사회의 통념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이해된다는 점 말입니다.

 

2. 작자 미상의 시 「당신은 나의 것」

 

당신은 나의 것, 난 당신의 것

반드시 이를 믿어야 해요.

당신은 내 심장 속에

그냥 싸 안겨 있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당신은 항상 거기 머물러야 해요.

 

凸: 시적 표현이 간명하고도 정갈하게 다가오는군요.

凹: 네. 인용 시는 독일 여성 시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2세기 중엽의 필사본에 기록되어 있는데, 필사본은 남부 독일의 테건 호수 근처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의 어느 수녀가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알려집니다. 추측하건대 수녀는 라틴어 산문과 수사학에 정통한 것 같습니다.

 

凸: 시작품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남녀의 사랑을 포괄할 수 있을까요?

凹: 중세에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적으로 차단되어 있었지요. 우리는 종교적 황홀감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열정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인간은 모든 것을 지니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완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수사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 - 1274)의 “오성”보다,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1266 - 1308)의 “의지”를 선호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지의 개념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열정과 연결된 것 같습니다.

 

凸: 아, 그게 “그리스도의 몸 corpus Christi”을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종교적 열광이로군요.

凹: 그렇습니다. 종교적 열광은 마리아의 환영으로부터 마돈나 숭배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가장 고결한 분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은 “신비적 결합unio mystica”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영지주의에 입각한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서」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며, 당신은 나입니다. 당신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으며, 모든 생명 속에 씨 뿌려져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오시든 간에 나를 모으십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모은다면, 당신은 자신을 모으시는 셈입니다.” 나와 너의 신비적 결합을 이처럼 휘황찬란하게 형상화한 글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凸: 황지우 시인은 자신의 시집 한 권을 “나는 너다.”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근원적으로 결핍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규정하려 한 게 아닐까요?

凹: 아마 그럴지 모릅니다. 내가 혼자의 몸으로 머물지 않고, 너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될 때 인간은 신의 특성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됨의 가치는 상대방과의 관계에 의해 드러나지 않습니까?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 1965)도 주장한 바 있듯이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너”의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물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이며, 너는 나이다.” 이러한 구절 속에서 우리는 아담에 대한 이브의, 혹은 이브에 대한 아담의 “합일의 열망”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