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2) 혐오에서 연민으로

필자 (匹子) 2024. 3. 14. 09:40

(앞에서 계속됩니다.)

 

차라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혐오를 혐오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회적 혐오의 여러 증상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쩌면 관용에 근거하는 방관의 자세를 습득해야 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관이란 타인의 고충을 그냥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자 내지는 타자의 다른 삶의 방식을 용인하자는 말입니다.

 

가령 "침"을 생각해 보세요. 입속에 고여 있는 침은 나의 소화 기능을 돕는, 꼭 필요한 액체입니다. 그런데 나의 침이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침은 타자에게는 더러운 무엇으로 인지됩니다. 나의 침은 입에 고여 있을 때 깨끗하지만, 밖으로 튀길 때 불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듯 혐오의 배후에는 자아의 깨끗함, 순수함, 청결함, 결벽증세 등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은 지극히 깨끗하지만, 남들은 나만큼 깨끗하지 않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혐오를 떨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혐오를 혐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것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혐오하는 자를 포용하고 끌어안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설령 타자가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비난하더라도, "나"는 그를 이해하며 그와 함께 애도하고 슬픔과 한을 달래려고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연민 내지 동정심이란 독일어에 의하면 "함께 괴로워하는 행위 Mit- Leid"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자를 용서하고 달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행위입니다. 다른 한편 분노하는 자가 자신의 혐오감을 떨치려면 혐오의 대상을 자신에게 옮겨놓는 연습을 행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노여움이 오로지 "나"의 자아에서 비롯한 것이며, "나"의 전체적 존재는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함께 괴로워하고, 타인의 비극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인 나탄은 자신의 처자를 살해한 기독교도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내와 자식들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 복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탄은 원수의 자식을 자신의 딸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삭히고 타인의 증오와 비극을 끌어안는 일 -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냥 단순히 고찰해 봅시다. 너무 과도하게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면, 장수 (長寿)에 지장이 있습니다.

 

자고로 낙천적인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고 오래 삽니다. 증오심 때문에 우리는 밤에 깊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괴로움이 많으면, 입맛이 사라져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분 나쁠 경우 폭식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혐오를 연민으로 변화시키는 과업입니다, 그러면 내면에 따뜻한 인간애 내지는 평온한 사랑의 욕구가 어쩌면 내면의 심연에서 부글부글 발효할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혐오를 떨치고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사람을 위해서 필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놀라운 말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e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그러니 괴물과 정면으로 싸우지 마십시오. 싸우는 동안 당신 또한 괴물이 됩니다. 그렇디고 괴물을 용서하자는 뜻으로 곡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괴물을 용서하지는 말고 그의 잘못을 기억하되, 괴물을 불쌍하고 측은한 피조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괴물에 대한 측은지심 - 이러한 태도는 밖으로는 괴물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변모시킬 수 있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 자신을 가다듬게 작용합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