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서로박: (2) "물질 속에는 영혼이" 유기쁨의『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필자 (匹子) 2023. 9. 21. 10:47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인수 공통의 전염병은 숨어 있다. 코로나19가 지구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간과 동물의 질병은 이질적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동물의 질병은 인간의 질병과는 엄연히 구분되며, 인수 공통의 전염병의 수는 극히 적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은 주어진 조건 숙주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상호 감염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미국의 자연과학 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콰먼David Quammen은 오래전부터 코로나19의 가능성을 예견한 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가 인간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동물에게 다가가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을 포획하거나 죽이고 잡아먹으면서 밀접 접촉이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속으로 침투할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콰먼에 의하면 현재까지 알려진 전염병 중에서 60%가 인수 공통 감염병이다" (데이비드 콰먼: 『인수 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Spillover: Animal Infections And The Next Human Pandemic』, 강병철 역, 꿈꿀 자유 2017, 202쪽).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명명백백한 사실을 전해줍니다. 즉 인간의 건강이 동물의 그것과 직결되며, 인간의 전염병이 동물의 질병과 상관없이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항 말입니다.

 

8. 식물은 생명체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질병을 치료한다. 고대 켈트족의 사제계급이었던 드루이드는 나무 한 그루가 “물구나무선 여성”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의 존재는 주지하다시피 생명체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나무는 인간과 흡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의 살은 나무의 속살이며/ 사람의 힘줄은 나무의 가장 안쪽 속살과 같도다./ 이 둘은 모두 탄탄하다. 사람의 뼈가 안에 들은 것처럼 나무도 그러하며/ 사람의 골수는 나무의 진과 같다." (우파니샤드 3장 9편 28절) (286쪽)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이나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자이나교는 나무를 인간의 생명체로 이해했습니다. 자이나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마하비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살아 숨을 쉬는 모든 생물을 살해해서도 안 되고 폭력으로 다루어서도 안 된다. 생명체는 고통당하거나 박해당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요청되는 것은 지구상의 존재에 대한 비폭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이나교에서 중요한 사상적 심리적 모티프를 찾아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는 대지의 생명이며, 모든 축복을 부여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나아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받드는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취한 것의 대가로 선물을 주라/ 자신을 떠받치는 이들을 떠받치라. 그러면 대지가 영원하리라." (인디언 포타와미족의 격언) (301쪽)

 

9.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로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사실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이 원래 견지했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오성의 이름으로 영혼의 무엇을 철저하게 무시하였고, 오성의 이름으로 감성적인 무엇을 부수적인 것으로 좌시하였으며 그리고 남성의 이름으로 여성적인 무엇을 깔아뭉개 버렸습니다. 시장은 카를 폴라니가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을 갈아엎는 “암울한 악마의 방앗간dark Satanic mills”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1944, 33쪽, 한국어판: 카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 홍기빈 역, 길 1919, 163쪽.)

 

이로써 초기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인간 소외의 현상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객체로 구분되고 분할되기 시작합니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과 분화되었고, 자연은 마구잡이로 활용될 수 있는 도구 내지는 처녀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성의 존재는 전투적 수직적 남성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짓밟힐 수 있는 객체 내지는 도구로 취급당해 왔습니다. 이 와중에서 사랑과 우정과 같은 영혼의 가치는 깡그리 사라졌고, 에로스는 무차별적으로 섹스로 변모했으며, 농업은 천시되고 상업이 인간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10. 자본주의는 인간을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본 그리고 자본가가 저지르는 마구잡이식의 병탄(併呑)은 카를 폴라니의 사회 경제 이론 외에도, 이반 일리치의 젠더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의 여러 관점에서 세부적으로 논의된 바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합리적 사고는 근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애니미즘을 저열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습니다. 인간은 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에 의하면 당구공과 같이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마치 당구공이 서로 부딪쳤다가 다시 사라지듯이, 인간은 서로 재화를 주고받기 위해서 잠시 한 번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상실한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산업 구도가 인간을 마치 객체와 같은 존재로 변화시켜 왔습니다. 가내 수공업은 19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국가 중심의 산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산업은 급기야는 국가 이기주의를 자극하여, 식민지 쟁탈과 세계대전을 부추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원은 독점 자본주의와 함께 무한대로 착취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인구 폭발, 자연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기후 변화로 인한 제반 위기는 자본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빚어낸 필연적 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 영혼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기실 인간은 개별적 개체로 구분된 존재이지만, 사랑과 우정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서로 대아(大我)와 이타주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 “기대면서 (人)”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마치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 동에 모이듯이 (三十輻共一穀)”, 영혼 역시 상호적 믿음에 의해 지탱해나가는 바퀴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물심양면의 상호적 도움은 –페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도 자신의 책 『상호부조: 진화의 동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사랑과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과학 그리고 실증주의로는 명확하게 해명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DNA 속에는 한 인간의 모든 특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불교에서 말하듯이 “작은 먼지 속에는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一微塵中含十方)“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면 『애니미즘과 현대세계』는 자연과 인간 속에 자리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생태적 삶은 투쟁이 아니라, 평화이어야 하고, 파손이 아니라, 상생이어야 하며, 세계 앞에서 인간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방식으로 진척되어야 합니다.

 

12. 물질 속에는 영혼이 자리할까?: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는 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지만, 독자는 편하게 탐독할 수 있습니다. 책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 그리고 생명 사상을 연상시키는 웹툰 만화 또한 새로운 각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사뭏 속에 따뜻한 생명력이 자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물질 이후의 시대”에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영혼의 특징을 재발견하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일지 모릅니다. 이는 생명체의 분할되고 차단된 관계를 회복시키고, 치유하며 서로 협력하면서 살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특정 사물을 애지중지하는 “물신 숭배주의Fetischsm”를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페티시즘이 오늘날에 이르러 무작정 원시적이라고 저열하다고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원시인들이, 혹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귀하게 여기는 사물 속에는 치유와 회복을 위한 힘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식물과 약초를 통해서 우리는 이를 분명히 감지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엄 하비의 문장을 예로 들까 합니다. 이 말 속에 저자 유기쁨이 추구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과 세계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세계와 함께 하거나, 자연과 세계 속에 내재하는 존재다." (유기쁨: 앞의 책, 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