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꿈과 저항을 위하여. 서문

필자 (匹子) 2023. 8. 16. 08:15

박설호: 꿈과 저항을 위하여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1)

(서문)

 

1.

블로흐의 사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타당한 것은 아닙니다. 블로흐는 지나간 세기의 학자이니까요. 그동안 나는 8권의 블로흐 서적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본격적 블로흐 연구서를 단 한 권도 간행하지 못했습니다. 연구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틈만 나면, 블로흐의 번역에 몰두해 왔습니다. 비유컨대 양자의 출산 (번역서 간행)이 친자의 출산 (저서 간행)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블로흐의 문헌은 전집과 단행본을 합하여 도합 22권이 넘습니다. 앞으로 나 혼자 블로흐 전집을 완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아쉬움이 이 책을 간행하도록 자극했는지 모릅니다.

 

자고로 연구 대상이 연구자의 세계관과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블로흐 대신에 하이데거가 다루어지고, 브레히트 대신에 토마스 만이 거론됩니다. 토마스 뮌처 대신에 마르틴 루터가 언급되고, 빌헬름 라이히 대신에 카를 구스타프 융이 회자됩니다. 비록 반공주의가 활개를 치던 척박한 토양이지만 블로흐의 사상이 만개하기를 바라는 것은 다만 희망사항일까요?

 

2.

블로흐 사상의 핵심을 저항과 꿈이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저항과 꿈은 처음부터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해야 합니다. 예컨대 저항을 배제한 꿈은 하나의 신기루나 다를 바 없습니다. 먼 목표를 멍하니 기다리거나 감 떨어지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우리는 어떤 특정한 목표를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꿈 없는 저항은 실제 삶에 있어서 목표 없는 투쟁만을 부추길 뿐입니다. 현재의 사악한 현실을 비판하거나 파기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항이 모두 필요합니다. 당면한 문제점과 부딪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이 저항의 지조라면, 미래의 먼 목표를 설정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은 꿈의 정서일 것입니다.

 

감히 단언하건대 『희망의 원리』의 핵심어인 희망은 블로흐의 철학적 본질을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블로흐 사상 속에는 어떤 “거역 Trotz”의 정신이 생생하게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역의 정신은 예를 들자면 토마스 뮌처의 삶과 사상에서 생동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마지막 대목에서 “인간이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활하며,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는 모든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무너뜨려야 한다.” 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자후의 발언 속에는 주어진 나쁜 것에 대한 파기 뿐 아니라,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미래의 목표 등에 관한 의지가 공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마르크스의 발언을 오로지 정치경제학적 차원에 국한시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힘들게 살아가서도,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서도 안 됩니다.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돈과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으로부터 경멸당하거나 모욕당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우주의 꽃” (윤노빈)의 존재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귀한 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쓰레기처럼 짓밟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반드시 반인간적 삶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사회 및 역사 전반에 걸친 사항으로서 추적해야 합니다. 물론 정치경제학자들의 “지금 그리고 여기”에 대한 엄밀한 분석 작업도 귀중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보다 광범한 시각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항과 꿈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을까요? 꿈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구체적 현실을 선취하여 묘사하고 있다면, 저항은 “경멸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구체적 현실을 처음부터 구성적으로 제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꿈의 상”이 지상의 낙원인 페아케아스 섬에서의 안온하고 풍요로운 삶을 지칭한다면, “저항의 상”은 오로지 인민을 위해 폭동을 일으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행위 내지 독재자, 카이사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브루투스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말입니다. 부디 이 책이 독자에게 저항과 꿈에 대한 구체적 함의를 전해주는 자극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3.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책을 탈고한 뒤 수북이 쌓여 있는 자신의 필사본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문헌들이 창고의 재고품으로 쌓여있는 오늘날. 이 참담한 시대에 나의 아들은 과연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형편없습니다. 『꿈과 저항을 위하여』는 순서에 있어서 뒤죽박죽이고, 뚜렷한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반복 설명되어 있고, 일부는 처음부터 생략되어 있습니다. 나의 심경은 불치의 병자가 밤중에 갓 태어난 아이를 쳐다보는 (厲之人 夜半生其子) 것과 유사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새롭게 기술되지 않았습니다. 변명 같지만 본서는 그 자체 독립적인 완결본이 아닙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2)”에는 유토피아의 역사를 개관하고, 블로흐가 연구한 철학 사상,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등을 실을 계획입니다. 집필을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특히 울력의 강동호 사장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안산의 우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