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542) "희망의 원리"

필자 (匹子) 2022. 10. 28. 11:30

"광기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모든 것을 옛날 식으로 내버려두면서, 무언가 변화되기를 희망하는 태도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람들은 몸에 해로운 당의정 알약을 구하려고 줄을 서 있다. 대부분 인간은 눈앞의 당면한 문제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먼 곳을 바라보고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않는다.

...................

 

필자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다섯 권의 『희망의 원리』 (2004)를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제자도 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등록금 내는 것도 버겁게 여깁니다. 졸업하는 어느 제자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희망의 원리가 어떤 책인가요? 

 

문제는 나를 포함한 연구자들에게도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번역서를 언급하며, 그 속의 용어와 오역에 관해서 지적해주었습니다. 필자는 이에 대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독해 방법은 장님 코끼리 더듬는 행위를 방불케 합니다. 신학자들은 제5권의 신학 부분만을 읽고, 경제학자들은 제 1권 포이어바흐 등의 경제학 부분만 읽으며, 철학 전공자들은 제 3권 자연과 기술 부분만 독파하려고 하며, 세르반테스 연구가는 돈키호테 장만 읽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블로흐는 자신의 책이 신학의 영역에서만 활발히 논의된다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친애하는 J, 외람된 주장이지는 모르나, 30세 이전에 철학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문학, 역사, 예술 등의 영역을 섭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나이에 종교에 몰두하면, 당사자의 그릇이 너무 일찍 굳어진다고 루소는 『에밀』에서 주장한 바 있습니다. 모든 세부적 사항을 접한 다음에 보편적 사항을 추적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자 내지는 철학자는 신앙의 카테고리 내지는 경직된 추상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용어의 문제에서 시작되어 전문용어의 문제로 끝납니다. 세상에는 연구 영역 (용어 -> 문장 구문 -> 문장 -> 문단 -> 문맥 -> 주위 현실 -> 사회적 맥락 -> 거시적 역사 등)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편협하게 용어만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그 이유는 개념 규정이 진리를 서술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징한 사고이지, 사고를 규정하는 작은 언어적 표현이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는 마르틴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합니다. "사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낱말로부터의 의미를 도출해낼 수 없다." 그렇지만 전문 용어를 따지는 문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매도될 수는 없습니다. "낱말이 파괴된 곳에서는 사물이 존재할 수가 없다." (가다머) 필자는 다만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과도하다는 문제만을 지적할 뿐, 토론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비판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우리를 발전시킵니다.

 

 

 

번역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곡을 연주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비하면 저술은 훌륭한 악보를 창조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번역서에는 원본이 있지만, 저서에는 원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번역 문제로 시비를 걸곤 합니다. 필자는 번역 작업을 나 자신과 독자에 대한 봉사라고 믿습니다. 고매한 학문 연구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굳이 번역 작업에 매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무언가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있지 않는가요?

 

연구자들은 번역작업 대신에, 주로 논문만 발표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논문이 실적으로 인정되고, 번역은 실적으로 거의 인정되지 않습니다. 원래 자연과학의 경우 공식이 중요하고, 사회과학의 경우 논문이 중요하며, 인문과학의 경우 저서가 중요합니다. 연구재단은 학문 연구의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천편일률적 정책으로 추진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연구자들이 번역 작업을 부차적인 일감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번역서를 참고하면서도, 참고 문헌의 역자 이름을 분명히 예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번역의 문제에 이러저러한 토를 답니다. 직접 번역하기는 어렵지만, 남의 번역서를 비판하기는 너무나 수월합니다. 번역을 못하는 것은 무능함의 소치이며, 번역을 안 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입니다.  이는 나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발언입니다. 나 자신의 무능함과 게으름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역자가 저자의 노예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내기 위해서라도 번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