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창백한 얼굴의 하얀 그림자

필자 (匹子) 2022. 4. 30. 11:50

 

 

- “얼마나 많은 선남선녀들이 실제 삶 속에서 돈키호테로, 둘시네아로 살아가고 있을까?” (투르게네프) -

 

1.

오늘은 돈키호테와 둘시네아에 관해 언급할까 합니다. 돈키호테는 남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던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곤 합니다. 제 하나  몸 간수도 못하는데도, 그는 불쌍한 처녀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공언합니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속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기사는 고독한 바보입니다. 그의 체격은 장대하나, 몹시 말랐습니다. 누렇게 찌든 얼굴, 광대뼈 등은 광기로 인하여 수척한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를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여러 책이었습니다. 기사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천박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에게 어떤 결코 천박하지 않은 고결한 임무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뇌리 속에서 어떤 바보 같은 생각이 끓어올랐을 때, 책의 사소한 내용들은 어느새 연상 작용을 불러 일으켜, 스스로 점화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책의 내용이 상상이 끝난 다음에도 돈키호테에게 계속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내적 정서 속에는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영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현실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2.

가령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스스로 금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돈키호테는 여러 기사들 가운데 아마디스의 슬픈 고독을 따르기로 작심합니다. 이런 식으로 귀족 출신인 주인공은 계속 과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기사들의 태도, 투쟁의 상, 사랑의 상, 충직한 상 그리고 사회 형태 등 모든 것은 자신이 현재 속하고 있는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굳게 믿게 됩니다.

 

자칭 고결한 기사는 돈 한 푼 지니지 않은 채 어디론가 떠납니다. 그렇다고 돈키호테에게 돈이 없지는 않습니다. 산초 판사의 말에 의하면, 편력 기사가 어디서 돈을 지불하는 경우를 어느 책에서도 읽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금 지불의 원칙”은 기사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사들은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돈키호테는 엄청난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즉 편력 기사의 생활 그리고 그의 이상은 사회의 모든 경제적 형태 속에서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둘시네아의 조각상 1957년 페데리코 코요-발레라의 작품이다. )

 

3.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요? 돈키호테는 한번도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 거세된 양떼는 군인들로 보이고, 구름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성 (城)으로 비칩니다. 풍차의 날개는 험상궂은 거대한 인간으로 보이며, 반쯤 깨어진 이발사의 세숫대야가 햇빛에 비칠 때, 그것은 영웅의 투구로 보입니다. 기사가 갈망하는 꿈은 날개 달린 말, 날개 달린 사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햇빛에 비쳐 불타는 듯이 보이는 바다, 그리고 누군가 헤엄치는 듯이 떠있는 섬들은 마치 수정으로 만들어진 왕궁과 같이 보입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착각은 단순히 사회적 시대착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고대적 갈망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서, 어떤 미래의 세계와 지속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돈키호테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고결하고, 아주 휘황찬란한 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력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현실만이 중요하며, 주인공의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진리로 작용할 뿐입니다. 

 

(토보소에 있는 둘시네아와 돈키호테 조각상.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

 

4.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은 어느 날 아주 몹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삭신이 너무나 쑤시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목로주점의 다락방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갑니다. 이때 가축을 돌보는 하녀가 돈키호테가 누워 있는 방에 살며시 기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미는 돈키호테의 눈에는 하녀로 비치지 않습니다. 그미는 고결한 전투에 가담하여 싸운 위대한 기사를 위로하러 나타난 아름다운 공주였던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손을 뻗어, 그미를 맞이합니다. 그미의 셔츠는 거친 포장용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가장 섬세하고 가장 부드러운 고급 삼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미가 들고 있었던 유리 등불은 그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동방의 진주와 같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미의 머리카락은 마치 말갈기처럼 뻣뻣했는데도, 그에게는 가장 세련된 아라비아 황금빛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잠자지 못한 그미의 입에는 샐러드 냄새가 가득했는데도, 돈키호테는 이를 이국적인 향긋한 조미료 냄새로 받아들일 뿐이었지요.

 

5.

인간 삶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자는 “사랑하는 임”일 것입니다. 가령 완전무결한 처녀로서 돈키호테의 뇌리에 존재하는 둘시네아는 주인공, 돈키호테에게 얼마나 어떠한 영향력을 끼쳤던가요?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직접 만나기를 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미와 만나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실로 바라는 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헛된 꿈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두려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사들의 연애 봉사 속에서는 성의 실천이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사들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정복되지 않은 처녀 외에는 어떠한 다른 여자를 완전한 여성이라고 칭송하지 않습니다. 문 앞에서의 이러한 기다림, 경험을 모르는 향유는 돈키호테의 경우 너무나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상상 속에서 둘시네아의 상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편력 기사들이 사랑하는 여성을 우상 숭배하는 것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미인은 이러한 우상 숭배를 통하여 “거의 도달될 수 없는 고결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토보소에 있는 둘시네아의 집)

 

6.

임을 애타게 갈구하면, 만남은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가요?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남자는 그미를 사랑하는 대신에, 그미의 상만을 사랑합니다. 돈키호테는 (비록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현실과 직접 부딪칩니다. 그러나 둘시네아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미는 하나의 명상으로서 돈키호테의 뇌리 속에서만 출현할 뿐입니다.

 

독일의 작가 투콜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키 크고 날씬한 분을 갈구하지만, 작고 뚱뚱한 분을 얻는다. 그게 삶 C'est la Vie!”이라고 말입니다. 친애하는 T, 둘시네아는 아주 가까운 곳 "토보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돈키호테는 그미를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즉 그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그미로부터 떠나 있어야 한다고. 참으로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요? 마치 키르케고르가 젊고 매력적인 여성 레기네 올젠을 저버림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차지하리라고 믿었듯이, 돈키호테는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커다란 가상적 위안을 얻게 됩니다.

 

친애하는 T, 이 경우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타난 정서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는 왜곡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면 뺏어라"라는 전언이 만고불변의 진리로 작용하지 않는가요?

 

7.

그렇다면 비극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돈키호테에게 둘시네아의 모습을 인지할 감각적 수단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돈키호테는 깨어있는 꿈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실존을 마냥 시험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희망의 세계는 자신에게는 실제 세계입니다. 그것은 기사들의 전설 그리고 그들이 추종하는 여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희망의 세계 속에 그리고 갈구하는 세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세계가 -제한적인 의미에서 고찰할 때- 결코 천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시네아는 그 자체 “발견될 수 없는 여인 la femme introuverble”입니다. 그미는 오히려 꿈속의 현재형으로 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미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미를 애타게 갈망하지만, 그미는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 별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환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완전한 여인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이러한 상이 깨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돈키호테 그리고 둘시네아 -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그림자를 쫓는 인간의 방황을 느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m2rxslo0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