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이성욱과의 첫 만남

필자 (匹子) 2021. 5. 24. 18:50

 

 

근자에 이르러 이성욱의 여러 책이 간행되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이성욱을 만난 것은 198X년 여름이었다. 당시에 나는 귀국 후 부산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이성욱은 한신대 대학원 학생이었다. 그는 어떻게 주소를 알아냈는지 몰라도 (아마도 염무웅 선생님이 중간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편지를 써서, 한신대 임용을 권했다. 아마 초여름이라고 기억된다.

 

한우근, 차봉희 선생님은 나를 만나기 위하여 부산까지 내려오셨다. 어느 더운 여름 날 한신대에서 교수 임용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의 좌장은 주재용 학장이었다. 특히 학생처장으로 근무하시던 故 고재식 박사님이 나에게 유독 까다로운 질문을 많이 던졌다. 면접을 마친 뒤에 나는 처음으로 이성욱을 만났다. 누런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으나 (처음에는 끽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두 눈동자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교정 이곳저곳에서는 “학장 퇴진” 등의 글씨가 쓰여 있었고, 본관 정문의 많은 유리창이 박살나 있었다. 독문과 학생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배후 조종자로서 윤교희, 현철호, 오동식, 이재학 등을 거론했다.

 

돌아오는 길에 국중광 선생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후덕하게 보이는 둥근 얼굴이었다. 성욱과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차 시간을 기다리다가 (나는 당일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어느 찻집에 들어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찻집에서 우리는 우연히 故 정운영 선생과 마주쳤다. 마당발 이성욱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정 선생님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한신대에 교수 임용 서류를 낸 박 아무개입니다.” 그는 멀거니 나를 쳐다보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 선생은 마치 개나 소를 바라보듯 나를 그렇게 멀거니 바라보았던 것이다. 일순간 내 마음속에서 심한 역겨움이 솟구쳐 올랐다. 어째서 그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을까? 그분이 왜 그러한 태도를 취했는지 그 순간만큼은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비판당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아닌가? 몇 년 후에야 비로소 왜 그가 나를 그렇게 냉혹하게 대했는지 약간은 이해할 것 같았다.

 

바로 그 날이 나와 이성욱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 그는 석사학위 지도 교수를 나로 선택하게 되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 이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우리는 드물게 만났지만, 나는 그와의 첫 번째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그와의 첫 만남은 나에게는 한신대 학생과의 첫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성욱이 놀라운 재능을 그냥 버려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게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죽음의 여신 모이라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가? 이성욱이 조금만 더 재능을 발휘하여, 좋은 책을 남길 수 있도록 내버려둘 것이지, 왜 그리 일찍 그를 저세상으로 데리고 갔을까? 또 다른 나의 제자 이계숙도 그러하다. 독문학을 공부하여 놀라운 포부를 지니고 있었던 이계숙은 10권 이상의 번역서를 발표하였다. 이계숙 역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성욱과 이계숙은 나의 선생들이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이기 때문에 선생이 아닌가? 어쩌면 이성욱 “선생”과 이계숙 “선생”은 지금도 저 세상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때로는 그가 선생 노릇 똑바로 하라고 나를 훈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처음 대하는 학생들은 내 눈에는 모두 이성욱으로 비친다. 그러니 학생 모두에게 간곡히 부탁하건대, 이성욱 선배의 몫까지 의미 있고 재미있게 살아가고 제발 나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