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현대불문헌

서로박: 에밀 졸라의 "모레 목사의 죄" (2)

필자 (匹子) 2021. 12. 23. 10:30

(8) 꽃봉오리, 그대는 아름답도다, 알비네: 놀라운 사건은 주인공이 철학자, 장베르나와 접촉하면서 발생합니다. 세르제는 외삼촌, 파스칼 루공의 소개로 장베르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철학자는 계몽주의적 사고를 견지하면서, 유물론에 대해 열광하는 기인이었습니다. 장베르나는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자로서 아르토의 고립된 지역에서 자신의 여 조카와 함께 칩거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파라두”라고 불리는 등나무 등으로 거칠게 엉켜 있는 정원이었습니다.

 

여조카는 알비네라고 불리는 불과 16세 나이의 청순한 처녀였습니다. 금발 머리를 지닌 알비네에게는 문명의 티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세르제는 알비네와 마주치는 순간 어떤 커다란 혼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주인공은 장베르나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려고 이곳을 방문했다가 아름다운 처녀 알비네와 마주치게 된 터였습니다. 그날 밤부터 세르제 모레 목사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데, 이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9) 행복의 짧은 순간, 오래 지속되는 고통: 외삼촌 파스칼 루공은 조카가 너무나 열성적으로 일에 골몰했다고 간파하고, 파라두에서 요양하도록 조처합니다. 여기서 알비네는 정성을 다하여, 병자를 간호합니다. “파라두”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속세와는 동떨어진 기이한 정원이었습니다. 세르제는 이곳에서 알비네와 함께 지내다가, 종교인으로서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알비네와의 동침이었습니다. 이는 주인공 세르제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고, 신경 발작의 위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후에 세르제 모레는 더 이상 과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꾸밈없이 아름다운 알비네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사랑의 감정으로 돌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속세로부터 동떨어진 정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허나 이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10) 모든 비극은 슬프다, 죽음 때문에: 어느 날 마을 수도사, 아상지아스는 정원으로 찾아옵니다. 그는 교회 일을 팽개치고 정원에 칩거하는 세르제 모레 목사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그는 정원 “파라두”를 떠나야 한다고, 주인공에게 훈계합니다. 세르제는 고뇌합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완전한 수도 생활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원에서 저지른 자신의 죄를 몹시 후회하게 됩니다. 유년 시기에 신을 추구했던 것이 이른바 마리아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이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후예로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세르제 모레는 인간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파라두” 정원을 몇 번 방문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알비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임신한 몸이 된 알비네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별 선언에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어쩌면 죽음이 그미를 사랑하는 임과 함께 머물게 하리라... 그미는 정원 근처의 바다로 가서, 해안 절벽에서 투신자살합니다. 친애하는 Y, 바다 위에는 파라두 정원의 꽃잎만이 무심하게 둥둥 떠 있었을 뿐입니다. 장례식에서 세르제는 눈물을 흘린 다음 교회로 되돌아갑니다.

 

(11) 친애하는 Y, 소설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혹하게 하는 것은 소설의 주제입니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입장이라든가 태도 등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지적으로 매우 앞선 인물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감정 발달에 있어서는 무척 낙후해 있습니다. 우연한 성적 경험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의 충격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하여 사랑의 능력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 (?)하게 된 셈입니다.

 

이 경우 사회 병리학적 요소는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며, 개인의 이후의 생활을 어느 정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육체 그리고 정신, 성적 충동 그리고 금욕적 자아 조절 사이의 갈등관계입니다. 비록 주인공이 소설의 말미에 후자를 택하고 있지만, 자신의 선택의 내적 이유가 불분명한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졸라의 소설은 정신병리학의 범례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지요. 주인공 세르제와 알비네 사이에 나타난 성의 교환이라는 순간적 돌출 행위는 그 자체 도피적이요, 불안정하게 비칩니다.

 

(11) 기독교, 혹은 성: 작가, 에밀 졸라는 구약 성서의 내용을 프랑스 현실에 접목시켜서 작품을 창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아상지아스는 에덴 정원에서 아담을 쫓아내는 천사처럼 보입니다. 세르제와 알비네 사이의 만남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마치 인식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처럼 보입니다.

 

무성한 나무들로 가득 찬 정원은 그 자체 자연이며, 거대한 에너지를 담은 유혹의 존재나 다름이 없습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서 등장인물의 내적 심리 상태에 관한 정확한 묘사는 지엽적으로 드러날 뿐이지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엔젠의 소설, “그라디바”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는 달리 졸라의 소설은 프로이트 심리학의 관심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