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당신처럼 생각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비어만과 쿠네르트

필자 (匹子) 2021. 11. 11. 11:46

 

사회: 비어만 씨, 당신의 새 앨범은 한 권의 책과 다를 바 없는데, “내 심장 조각 하나를 씹어 먹어라. Eins in die Fresse, mein Herzblatt”라는 상당히 공격적인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귄터 쿠네르트의 새로운 시집 제목은 전혀 다른 기상도에 의한 것으로서 “살인 조처 Abtötungsverfahren”입니다. 이는 두 개의 어떤 서로 다른 체험을 접하거나 마주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요? 두 사람은 두 분단국가 독일에서 서로 유사한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쫓겨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의에 의해서 나라를 떠났으니까요.

 

그렇지만 비어만의 경우 주어진 현재의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여 무언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주 투쟁적이며, 때로는 거대한 노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특히 루디 두츠케에 관한 시를 염두에 둔다면, 시적 정조는 매우 슬프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쨌든 비어만은 주어진 현실의 당면한 문제점을 예리하게 다루고 있어요. 쿠네르트의 경우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암울한 음색은 거의 절망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우연인가요, 아니면 하나의 구상일까요?

 

비어만: 당신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고찰하자면, 제목에서 당신이 이해하다시피 유사성이 발견될지 모르지요.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동독에서 살 때도 서로 달랐습니다. 만약 당신이 두 가지의 자세 그리고 두 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를 변증법적으로 읽는다면, 두 가지 사항은 서로 정반대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쿠네르트는 “살인 조처”라는 글을 씀으로써 살아남게 되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절망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 쿠네르트는 완전히 허리를 굽힌, 절망적인 인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가 온 곳으로부터 등을 돌려라.”하는 자세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약간 더 나은...

 

쿠네르트: 그렇게 단순히 말하지 마세요.

비어만: 아니, 아니, 현실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아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어요. 쿠네르트 역시 개구쟁이지요. 그에게는 자신을 동정하는, 눈물 떨어지는 슬픔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지요.

 

사회: 우리가 토론하려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비어만: 자신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면, 세계에 대한 연민이지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순진한 관찰자가 그렇게 느낄지는 몰라도, 쿠네르트 자신에게는 모든 게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아요.

 

사회: 좋아요, 내가 순진한 관찰자로군요. 쿠네르트씨, 당신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합니까?

쿠네르트: 비어만이 말하는 것은 참으로 내 마음에 드는군요. 나는 제발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바랍니다. 비어만이 말한 대로 내가 그러하다면, 세상이 성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마도 성자일 테지요. 나 역시 최소한 그렇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이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나 자신은 성자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세계의 상태에 대한 우울, 비애 혹은 절망 등은 개인 영역의 바깥에 위치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자주 어떤 유형의 유머와 함께 자리하는 법입니다. 예컨대 물위에 둥둥 떠 있는 좋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렇지만 물 아래의 토대는 이러한 감정과는 다르게 보이곤 합니다. 인간이 한편으로 세계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생각될 수 없지요. 그러한 한 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특징 지웠다고 믿습니다.

 

사회: 절망의 감정 속에 도사린 최종적인 무엇은 쓰라림일까요? 비어만은 “절망을 기술하는 행위 속에는 항상 어떤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전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작가가 계속 글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쓰라림이라든가 체념 등은 존재합니다. 하나의 최종적인 무엇으로서 말입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인간 내지는 세계의 상태에 관해서 말하십니다. 인간 내지 세계의 상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더 이상 믿지 않는 태도는 분명히 온존합니다. 조금 전에 당신은 이에 관해 말하셨지요?

 

쿠네르트: 어떤 유형의 밝은 절망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밝은 절망은 어쩌면 더욱 궁극적인 것인지 모르지요. 이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보건대 밝은 절망 속에는 이른바 공격성향이라든가, 무언가를 감행하려는 정신 혹은 이러한 절망을 억누르거나 억누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그다지 강하게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밝은 절망은 어떤 유형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라든가, 사라지는 무엇에 대한 기억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 하나의 중간평가일까요?

 

쿠네르트: 네. 하나의 결론으로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결론일 뿐이지, 개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밝은 절망을 스스로 확인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논의의 초점을 나의 시작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내 작품들을 비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염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계십니다만, 나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싶습니다. 즉 염세주의라든가 비관적이라는 표현은 나의 시작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나의 시작품은 오히려 리얼리즘에 근거하지요. 진단이라고 말하면, 너무 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 시들은 분석이라든가 진단 등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니까요. 이것들은 오히려 어떤 리얼리즘의 시각의 특성을 담고 있습니다.

 

사회: 비어만 씨, 쿠네르트의 발언은 작업하려는 당신의 충동과는 정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서로 유사한 행적을 걸어왔는데, 자신의 경험한 바를 완전히 정반대로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 유사한 경험을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작품 속에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비어만: 쿠네르트가 절망적인 시를 쓰면서, 자신의 집에서 즐겁게 지낸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건 터무니없는 발상입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 많은 교양을 쌓았건만, 기분이 더럽다.”는 유대인의 발언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슬픔의 독점화 현상에 대해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습니다. 그건 나를 화나게 만들지요. 물론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최소한의 범위에서 쿠네르트처럼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어요. 조금 전에 쿠네르트는 자신의 자세를 표현하기 위해서 두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절망과 우울이 그 단어들입니다. 내게는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세계의 영역입니다. 어쩌면 나 역시 절망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나를 절망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우울은 내가 정확히 파악하건대 나르시시즘에 입각한 슬픔의 표현입니다. 그건 한 인간에 되돌아가서, 더 이상 세계에 어떤 작용을 끼치지 못하는 무엇입니다. 나는 최소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싶습니다.

 

물론 나 역시 잘 알고 있어요. 물론 이 세상에는 어째서 우리가 반드시 몰락하게 되는가? 하는 수천의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 말이지요. 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아마도 자신의 몰이해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의 말은 마르크스의 말보다도 더 멋지게 들리지요.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다.”라는 발언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모든 진지한 사고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

 

쿠네르트: 인류가 꿈꾸어온 이상들은 원래 나쁜 실천 혹은 사악한 자들의 실천으로 인하여 완전히 왜곡되어 있어요. 그러나 오늘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세계의 물질적 정신적 편협성 속에서 과연 어떤 해결책이 생각될 수 있는가? 이 경우 하나의 실천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상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작은 실천으로서의 어떤 양자택일은 이른바 선택으로서의 어떤 삶이지요. 만약 우리 모두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양배추를 생산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일단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서독에서 약 사천만의 인간이 사라져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양자택일로서의 삶은 그 자체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의 질문은 다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긍정적인 사회 유토피아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세상이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과연 어떤 실천으로 이행될 수 있을까요?

 

비어만: 왜 인류가 반드시 몰락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한 수천가지의 이유를 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작가로서 그러한 이유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신의 시를 읽곤 하지요. 그렇지만 당신의 슬픈 시편들 역시 나를 자극하지요. 저항감을 느끼거든요. 당신의 태도는 언제나 나를 화나게 만들어요. 물론 나는 당신의 작품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담긴 절망이 진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마치 유행을 치장하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편들은 정말 나를 분노하게 만들어요. 내가 보건대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거나 반항합니다. 그들은 절망에 빠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저항하려고 하지요. 사람들은 어떠한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참담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들은 어떤 해결책을 찾습니다. 내가 여러 사실들을 모순적 상황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살 수 있을까요? 모순은 어느 장인이 말하기를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해당하지요.

 

사회: 당신은 방금 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어떠한 희망인지요? 유토피아는 오늘날 환상으로 쇠퇴하지 않았습니까?

 

비어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꿈들이 한번도 해체되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아실 텐데요? 유토피아는 항상 있어 왔으며, 현재도 존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꿈 없는 인간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러 저러한 절망적인 이유로 인하여 새로운 힘, 유토피아와 희망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할 능력이 없다고 당신은 주장합니다. 과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대담한 주장을 피력하는 것입니까? 희망과 유토피아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보 전진하게 하고, 생존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날에 이르러 민족들은 자신의 고유한 문화라든가 고유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쿠네르트: 이제 정말로 당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 인류학적으로 소수에 해당하는 민족이 멸망하는 경우를 접하곤 합니다. 가령 남아메리카의 인디언을 생각해 보세요.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지구 위에는 오로지 유럽이라는 문명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산업 문명을 추종하려고 합니다. 그들 모두가 군사적으로 무장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새로운 국민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군대가 아닙니까? (...)

 

비어만: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은 그 자체 타당할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내용을 이미 로마클럽 보고서에서 읽은 바 있어요. 그렇지만 놀라울 만큼 발명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 동물이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지구 전체로 확장되어 있는 한 인류가 자신을 스스로 돕고, 늪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요소는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작가로서의 과업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