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3. 서문

필자 (匹子) 2021. 6. 3. 17:35

 

“기회Καιρός”는 의외로 어떤 끔찍한 위험을 수반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사는 언제나 위기와 기회의 연속적 변화과정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유토피아의 사고는 항상 위기 상태에서 점화됩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난관을 극복하려는 가능성을 생각해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불행과 위기가 때로는 행복과 기회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불행한 사고는 대부분의 경우 내리막길에서 발생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편안함, 자만 그리고 나태함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안온한 삶, 나태한 삶이 오히려 역으로 우리의 영혼을 망치게 하는 계기일지 모릅니다.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른 사람은 잠이라는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래, 잠은 꿈을 망치게 합니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 교활하게 행동하는 자들은 위정자들입니다. (Günter Eich: Fünfzehn Hörspiele, Frankfurt a. Main, S. 88). 힘 있는 자와 돈 있는 자는 “현재 상태Status quo”가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애타게 바라는 자들은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항상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사제 계급과 상인 계급을 비교해보세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제 계급은 권력과 금력에 가까이 빌붙어서 사회의 변화를 차단시켜 왔습니다. 이에 비하면 상인 계급은 대체로 세상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곤 합니다. 물론 상인 계급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전환의 시기에 신속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인들입니다. 주어진 세계가 급속히 변화하면, 그럴수록 재화의 유동은 격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어디론가 항해하는 여행객입니다.

 

필자는 이미 간행된 제 1권과 제 2권에서 고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유토피아의 사고를 천착하였습니다. 본서인 제 3권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이르는 시기의 유토피아의 문헌들 다룹니다. 공간으로서의 유토피아는 그 기능에 있어서 시간 유토피아, 즉 “우크로니아 Uchronia”로서의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18세기 중엽부터 사람들은 “나중의 저기”가 아니라, “미래의 여기”에서 어떤 더 나은 사회를 건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유토피아의 정태적 시스템으로서의 성격은 서서히 약화되고, 현실 변화를 역동적으로 이룩하리라는 사람들의 의향은 더욱더 강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보다도 계몽주의 사상이었습니다. 가령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국가와 인민 사이의 동등한 계약관계가 성립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의 유토피아는 국가주의, 혹은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는 생시몽과 카베의 유토피아와 같은 국가 중심적 대규모의 사회구조의 틀을 갖추고 있다면, 후자는 오언과 푸리에의 경우처럼 비국가중심의 소규모 공동체를 하나의 틀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생시몽과 카베는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공동체의 체제를 구상하면서, 정치적으로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국가의 가능성을 타진한 데 비하면, 오언과 푸리에는 지방분권적 소규모의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자생적이고 자치적인 삶의 방식을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국가의 권력 체제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출현하였습니다.

 

가령 우리는 이러한 면모를 푸리에 그리고 데자크의 공동체 구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나중에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다시 한 번 비국가주의 공동체의 특성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19세기의 대부분의 유토피아들은 산업 혁명 이후로 르네상스 시대에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되던 근검절약이라는 생활방식을 거의 파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생시몽과 카베의 경우 과학 기술의 도입으로 생산력 증가를 극대화시켜서, 중앙집권적 공동체 국가의 주민들로 하여금 심지어 어느 정도의 범위의 사치를 용인하고, 풍요로운 행복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사회적 경제적 측면의 변모를 추동하였습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유럽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켜나갔습니다. 고대에 널리 퍼졌던 질적 가치로서의 자연, 영혼적인 것 그리고 여성적인 것은 퇴보를 거듭하고, 그 대신에 합리성Ratio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고대적 가치를 포함시키지 못하고, 철저히 배제했던 것입니다. 시장이 작동되었지만, 경제적 상승에 대한 기대감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전환에 의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는 의미로 변화됩니다. 시장은 물물 교환을 활성화시켜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대지주의 자본가의 이익 추구를 위해 작동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장은 더 이상 자기 치유의 능력을 지닌, 사용 윤리를 실천하는 토대가 아니라, 마치 “암울한 악마의 방앗간dark Satanic mills”과 다름이 없습니다. 시장은 인간과 환경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자유는 모조리 박살나기 시작합니다.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1944, 33쪽). 여기서 말하는 “악마의 방앗간”이라는 표현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예루살렘」이라는 시에서 산업혁명을 “암울한 사탄의 방앗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카를 폴라니는 블레이크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시장의 자유방임주의가 개별 인간의 경제적 삶에 얼마나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는가를 지적하였습니다. 국가와 정부 그리고 발전된 과학 기술은 이러한 전환을 작동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상기한 변화 과정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을 고찰할 때 자본주의의 가장 끔찍한 영향으로 각인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에 관한 서양인들의 사고는 궁극적으로 세 가지 모티프에서 태동하였습니다. 돈의 무한대의 증식과 이로 인한 폐해, 갈등과 전쟁이라는 여러 유형의 폭력 그리고 이기주의의 생활관 등에 대한 비판이 그것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유토피아는 -국가주의, 혹은 비-국가주의든 간에- 어떤 새로운 인간형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 협동성 그리고 대아의 정신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양인의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개인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녕을 두레 공동체의 생활방식은 서양인에게 결여된 무엇을 부분적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큰 자아를 도모하는 한국인들의 이타주의의 생활방식은 구분과 차단이라는 서양의 사고에서 파생되는 제반 유형의 갈등, 미움, 질투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생태 공동체의 실천이야 말로 미래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4권 그리고 제 5권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울력의 강동호 사장님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리며...

 

안산의 우거에서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