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랑하는 알베르틴느, 그미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 제 1권, 스완의 이야기는 개성이 어떻게 다층적이고 불균형적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주인공의 의식은 주어진 현재에서 어떤 다른 여성을 동시에 고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임은 주인공의 의식 속에 교착되고 중첩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바라보던 그미의 모습은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프루스트는 잠든 알베르틴느를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그미를 묘사합니다. “알베르틴느라는 이름을 지닌 많은 처녀 가운데 내가 사귄 처녀는 한 명의 알베르틴느였다. 그런데 일순간 수많은 알베르틴느가 나의 침대 위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 그미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내 눈에는 마치 새로운 처녀가 계속 나타나,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는 것처럼 비쳤다. 그들은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여자들이었다. 일순간 나는 한 명의 처녀가 아니라, 수많은 젊은 처녀를 소유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제 V권 갇힌 여인: 104).
24. 망각의 에너지: 주인공은 다양한 상을 떠올리면서 주어진 세계로부터 도피합니다. 이러한 도피 행위는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 사랑하는 임의 존재마저 인식할 수 없는 곳까지 이어집니다. 프루스트는 기억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동일성조차도 흐려지는 지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로써 마주치는 것은 시간의 심리학적 구상입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간 속에 기하학이 자리하는 것처럼, 시간 속에는 하나의 심리학이 자리한다. 이러한 내적 심리학 속에는 피상적인 심리학이 수리적으로 계산해내지 못하는 어떤 시간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주어진 시간 외에도 인간이 충분히 고려하는 못하는 어떤 망각일 것이다. 나는 망각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있다. 망각이야 말로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이 활용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도구가 아닌가? 망각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생동감 넘치는 과거를 끊임없이 파괴한다. 왜냐하면 생동감 넘치는 과거는 이 경우 주어진 현재와 모순관계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25. 프루스트의 문체: 프루스트는 인간의 감정의 한계선과 심리 상태의 놀라운 뉘앙스를 빠뜨리지 않고 세밀하게 서술합니다. 이로써 작가가 도출해내는 것은 심리의 변모 가능성, 혼란스러움입니다. 인간의 심리는 자신의 사고와 불일치할 정도로 정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고상함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작가가 노골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충동적 삶의 비합리적 동력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연약하고, 안온하며 순수하게 솟아오르지만, 때로는 지옥의 용광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의 마그마로 치솟기도 합니다.
이로써 프루스트는 (지금까지 문학작품에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순간적 감흥의 진행 과정을 포착하여, 일상 속에서 그냥 사라지는 사물의 정수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마르셀이 접하는 것은 감각적인 인지 행위입니다. 작가는 일견 아무런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내면을 정밀하고도 세밀하게 서술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작가는 “꽃의 문양이 그려진 이불에서 풍기는 놀라운 냄새"를 서술합니다. 그 냄새는 인습과는 무관한 끈적거리는 듯하고, 가슴 떨리게 하는 흔들림을 안겨줍니다. 문장은 때로는 기억의 흐름대로 유장하게 이어지기도 합니다.
26. 시간, 인형의 몰골로 서성거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 1권 그리고 제 7권의 제목 『다시 되찾은 시간』은 기묘하게도 하나의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은 놀라운 쇼크를 느끼면서 경악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방황했던 그의 노력은 순간적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주인공은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집을 방문합니다. 이때 그는 오래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조우합니다.
나이든 다쟁쿠르d'Agencourt의 얼굴은 주인공에게 어떤 계시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공장 부인의 손님들은 주인공의 눈에는 기이하게도 마치 마스크를 쓴 인형들로 보입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는 기이한 색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의 앙금 속에서 오래 전에 상실해버린 색채였습니다. 원래 시간은 통상적으로 인간의 눈에는 가시적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마르셀의 눈에는 인형들로 비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형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27. 과거의 자아와 조우하다. 현존재의 단편으로서 인지되는 시간: 도서관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 있다가 마르셀은 어떤 충격을 감지하면서 시간과 다시 한 번 조우합니다. 그는 암호 문서에서 하나의 부호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죽음의 부호였습니다. 시간의 마지막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의 객관적 상관물은 죽음의 부호였던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삶의 일반적인 법칙이라면, 그가 사라지지 않을 방도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술작품입니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사멸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발견이야 말로 놀라운 교훈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기억이라는 미로를 헤매면서, 자기 자신을 만나려고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기억해내는 자아는 과거 속에 기억된 자아와 조우하게 됩니다. 이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가 언급한 바 있듯이- 기억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중적 유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공 마르셀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면서, “현존재의 단편으로 인지되는 시간”과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르셀은 과거로 향한 발걸음 속에서 자아의 환한 빛을 재인식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기억의 도움으로 과거를 빠져나와 주인공 앞에 의식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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