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파나이티오스의 스토아 사상

필자 (匹子) 2019. 3. 27. 13:55

1. 새롭게 거듭난 신선한 스토아 사상: 스토아 사상이 그리스인들의 보편적 정신의 삶을 포괄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파나이티오스의 위대한 사상적 토대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식견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파나이티오스는 자신의 고유한 삶의 견해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을 분명히 파악하여 스토아사상의 결실을 맺게 한 장본인입니다. (Schütze: 497). 스토아 사상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러 신선함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시포스가 스토아 사상적 체계를 집대성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의 독단적인 이론이 형성되었고, 사상적 단초는 교육에 있어서 어떠한 토론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메마르고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틀을 깨뜨린 사람이 바로 파나이티오스입니다.

 

2. 파나이티오스의 삶: 파나이티오스 (BC. 185 – 109)는 로도스의 명문가의 한 사람인 니카고라스 Nicagoras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원전 168년에 그의 아버지가 로도스의 사절로서 아테네로 떠났을 때, 파나이티오스는 아버지를 대동하여 아테네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카르네아데스 그리고 크리톨라오스 등의 강연을 듣곤 하였습니다. 파나이티오스는 스토아의 사상 뿐 아니라, 스토아를 반대하는 카르네아데스의 학문적 체계를 일차적으로 접한 바 있으며, 나중에 스스로 스토아학파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나이티오스는 바빌로니아 출신의 디오게네스 그리고 그의 제자인, 타르소스 출신의 안티파트로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기원전 170년에서 150년 사이에는 포사이돈 히피오스의 사제 관청에서 일했습니다. 특히 기원전 146년에 그는 로마 사람들과 함께 폴리비오스의 북아프리카 연구 여행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파나이티오스는 기원전 144년에 로마에서 스키피오 서클에 가담함으로써 사상적 결실을 맺게 됩니다. 특히 두 번째 스키피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투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 등과의 만남은 그에게 정치적인 버팀목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역사철학과 국가이론에 관해서 역사학자 폴리비오스와 심도 넘치는 토론을 벌였는데, 이는 스키피오의 서클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기원전 141년부터 139년까지 그는 두 번째 스키피오의 책사로서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로도스의 지역을 여행하였습니다. 특히 아테네에서 스토아학파를 이끌던 안티파트로스를 도왔는데, 기원전 129년에는 그의 후계자로서 스토아학파의 제 7 수장으로 임명되어, 약 20년간 학파를 이끌었습니다.

 

3. 파나이티오스의 철학에 나타난 개괄적인 특성: 파나이티오스의 문헌은 오늘날 전해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문헌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유추하여, 이를 요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나이티오스는 크리시포스의 엄격한 틀을 추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카르네아데스의 회의주의의 사고에 동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평무사한 태도로 모든 헬레니즘 철학의 학교의 근본에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공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Schütze: 498). 스토아의 사상적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는 스토아 사상의 근본을 파악하려면 플라톤 그리고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아테네의 철학자이자 플라톤의 제자인 크세노크라테스Xenokrates의 가르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역시 사상의 근본을 구명하는 작업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그는 플라톤과 제논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거론하면서 스토아 사상에 새로운 특성을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의 로마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4. 파나이티오스의 물리학과 우주론: 파나이티오스는 세계는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스토아학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의 탄생 이론을 전적으로 부인하였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세계는 어떤 “거대한 화재 ἐκπύροσις”가 종식되고 난 이후에 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자체 허구라는 게 파나이티오스의 지론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운명의 영원한 회귀에 관한 이론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과거에 초기 스토아 사상가들이 운명의 회귀를 하나의 철칙으로 삼은 데 비하면, 파나이티오스의 입장은 초기 스토아 사상의 숙명론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획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예언이라든가 점성술의 가르침은 파나이티오스에게는 미신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주와 세계 질서에 관한 그의 입장은 책 『예견에 관하여Perί pronoias』에 기술되었는데, 이 책의 내용은 키케로의 『신들의 본질에 관하여De natura deorum』 (BC. 45)에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스토아사상이 기원전 2세기부터 신의 예정조화설이라든가 숙명적 특성을 떨치고,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오로지 파나이티오스의 사상적 영향 때문입니다.

 

5. 인식 이론과 논리학에 관하여: 인식 이론에 관한 한 파나이티오스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즉 감각적 인지 행위라든가 이른바 “경직된 확고부동함κατάληψις” 등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얼마든지 채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나이티오스는 감각적 인지 행위 그리고 경직성을 절대적 진리로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 속에서는 얼마든지 어떤 착오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부수적인 기준 내지 예외적인 기준이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논리학에 관해서 파나이티오스는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사상가 크리시포스는 논리학을 저술하면서 모든 명제를 세부적인 사항까지 구분하고 절단하곤 하였는데, 이는 파나이티오스에게는 끔찍한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6. 이성과 윤리학에 관하여 (1): 파나이티오스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도덕적 자세와 행동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언젠가는 사멸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파나이티오스는 크리시포스가 주장한 바 있는 “인간은 단일신의 특성을 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이른바 “영혼의 주도적인 부분 Hegemoikon”인 이성의 능력은 파나이티오스에 의하면 사고하는 능력이라든가, 육체의 움직임, 언어, 호흡 등을 포괄하는 운동의 능력과 병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근원적인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인식하려는 충동, 자신과 종족을 보존하려는 충동, 다른 사람을 뛰어넘으려는 충동 그리고 질서와 척도를 마련하려는 충동이 네 가지 기본적인 충동이라고 합니다. 파나이티오스는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충동에서 네 가지 핵심적인 미덕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들은 지혜, 정의, 용기 그리고 사려 깊음 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정서는 자연적인 충동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파나이티오스는 이를 근절시키지 않고, 이성을 활용하여 이러한 충동을 스스로 제어하기를 요구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정을 찾아서 이를 극복해내어야 한다고 합니다.

 

7. 이성과 윤리학에 관하여 (2): 인간은 파나이티오스에 의하면 네 가지 가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편성, 개성, 외부의 사회적 직책 그리고 의지의 자발적 결정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어떤 보편적 강령은 때로는 자유로운 한 명의 인간을 구속하는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개성에 의존하다보면, 자신이 인간으로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회적 직책 역시 타인을 과도하게 의식하게 되어 무언가 잘못 판단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의지의 자발적 결정은 때로는 인위적이고 자기중심적 판단에 의해 나타난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파나이티오스는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는 행위 οἰκείωσις”를 내세웁니다. (Forschner: 51). 이로써 인간은 미덕, 외적인 재화로 인한 행복, 건강 그리고 권력 등을 무조건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게 파나이티오스의 지론이었습니다.

 

8. 정치에 관한 입장: 그렇다면 개인의 도덕적 가치는 개인과 사회의 유용성의 가치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 파나이티오스는 “정치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의무론Perí tu kathékontos”을 언급합니다. 나중에 키케로는 파나이티오스의 사고를 근거로 『의무론De officiis』을 집필한 바 있습니다. 파나이티오스는 폴리비오스와 함께 군주제, 과두제 그리고 민주제의 혼합 형태를 최상의 국가체제라고 명명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키케로의 그것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로마 제국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파나이티오스가 로마 제국과 다른 민족을 동등하게 파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은 인종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에 비해 우월하므로, 얼마든지 전쟁을 수행하여 다른 민족의 땅을 복속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 문화에 대한 과도한 신뢰감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파나이티오스의 사상적 취약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