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로스의 포트노이의 하소연

필자 (匹子) 2020. 2. 5. 11:37

1. 어느 유대인의 정체성 그리고 심리상태: 필립 로스의 소설 『포트노이의 하소연』은 1969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단순히 “포트노이의 불평 Portney's Complaint”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적 주제는 제목을 “따지는 행위” 내지 “불평”의 측면에서 이해할 게 아니라, 어떤 심리적 갈등, 이를테면 콤플렉스, 병적 증상 내지 노이로제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설의 제목은 『포트노이의 하소연』으로 번역되는 게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나이또래이며, 작가의 실제 현실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독서할 때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 한 사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춘 주인공 포트노이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못내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형적으로 기만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음 충분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는 정신분석학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슈필포겔 박사인데, 주인공은 그를 찾아가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토로합니다. 그를 찾아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33세에 불과한데도 포트노이는 간헐적으로 성적으로 불능상태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주인공의 성도착 그리고 그의 부모: 소설은 주인공 포트노이의 심리 상태를 여러 가지 사례에 병행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문제점은 소설 속의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지적하고, 주인공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어떤 겸연쩍으며 창피한 기억을 도출해내기 위함입니다. 알렉산더 포트노이는 작가 필립 로스의 분신인데, 그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어떤 기이한 애정의 집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의 성도착에 가깝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부러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시기하고 경멸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만성적 변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로지 자신의 변비를 치유하려고 안달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보험회사의 사원으로 일했는데,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백인 상사로부터 실적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대한 고객은 대부분의 경우 흑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말단 직원 유대인으로서 상사로부터 그리고 고객으로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아버지의 갈등과 주인공의 성욕: 그런데 아버지가 변비에 시달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커다란 신경을 쓰지 않고, 어린 알렉산더를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미는 남편의 변비의 근원을 추적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아들만 잘 키우고, 잘 먹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과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본능적으로 젖 빠는 버릇 그리고 자위하는 버릇을 일찍부터 습득했습니다. 

 

이러한 버릇은 주인공이 나중에 성인이 된 이후에 술집 여자들과 성교할 때 특히 구강 섹스 Fellatio를 애호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주인공은 사춘기 시절에 이르러 지적으로 탁월함을 드러내었지만, 이와 병행하여 성적으로 너무 조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성욕을 해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33세가 될 때까지 주인공은 오로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였습니다.

 

4. 주인공의 불만, 성 불능과 죄의식: 그런데 포트노이의 내면에는 어떤 불만족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열등의식 그리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뉴욕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친구와 고객을 대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활해 왔습니다. 그는 일터에서 그리고 사교적 모임에서 자기 자신이 언제나 인류의 고결함 내지 인간의 권리를 위해서 노력한다고 공언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비-유대인계 백인들은 스스로 유대인과 흑인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주인공은 이에 대해 어떤 인종적 열등의식 내지 노여움을 느낀 게 분명했습니다. 주인공은 슈필포겔 박사에게 자신의 모든 체험, 갈망 그리고 내적인 불안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습니다. 슈필포겔 박사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어서 그의 성 불능 상태 그리고 죄의식을 진단해나갑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불만 사항과 반감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는 내면을 들여다 볼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더 흐릿하고 불명료한 나르시시즘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목격합니다.

 

5. 주인공의 성욕은 열등의식에 대한 반대급부로 나타난 우월 의식의 표현이다.: 포트노이에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집요한 성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강박과 같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이를 부인하고 다른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결벽증은 성의 탐닉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실 주인공 포트노이는 지속적으로 성적 성취감을 맛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그 자체 하나의 충동적 성향 (때로는 좋은 평판의 파괴 내지 굴욕감으로 향하는 성향)으로 분출했던 것입니다. 

 

그의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으로 마음에 품던 유대인 여자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어머니에 대한 내적 사랑의 욕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수많은 비-유대인계 여성들을 유혹하여 성을 탐하려던 욕구 역시 어떤 강박관념의 상태에서 비롯한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 성을 나눔으로써 주인공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우월한가? 하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포트노이는 언제나 어떤 열등의식 내지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나아가 때로는 자신의 행위가 스캔들을 부추길 수 있고, 성병을 얻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그밖에 때로는 거세당할 수 있다는 강박적 두려움 때문에 그는 성적으로 완전한 욕망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6. 몽키와의 만남 그리고 그미로부터의 소외감: 어느날 포트노이는 몽키라고 불리는 여성을 만납니다. 그미의 이름은 메리 제인 리드였습니다. 그미를 만남으로써 주인공은 더 이상 여성들과의 끝없는 애정행각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몽키는 모든 유형의 성적 쾌락의 짓거리에 거의 도를 통한, 발정 난, 그야말로 “암컷 원숭이”였으며, 교양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이한 마네킹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인공은 몽키와 사귀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맛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의 직업적 삶에 위협을 받게 되며, 언젠가는 평범한 시민으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희망마저 저버리게 됩니다. 포트노이와 몽키는 함께 로마에 체류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느 이탈리아의 창녀와 함께 셋이서 방종한 섹스를 즐기려고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은 몽키와 이별합니다. 왜냐하면 몽키는 그리스에 체류할 무렵에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말하면서, 주인공에게 위협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포트노이는 어떤 극도의 죄의식의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7.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다. 주인공의 성 불능: 주인공은 깊이 숙고하다가,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그곳만큼은 유대인들이 소수로 살아가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포트노이라는 존재는 적어도 이스라엘에서는 익명의 다수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인공은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즉 자신은 이스라엘 유대인 속에서 결코 동화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로 판명 나고 맙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성적으로 거의 불능의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동족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합니다. 주인공의 페니스는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시온 성은 더 이상 주인공의 체류를 더 이상 허가하지 않습니다.

 

8. 유대주의 그리고 미국 문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작가 로스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어떤 왜곡된 현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적 특성은 마치 캐리커처를 방불케 합니다. 작가는 쓰라린 유머를 동원하여 주인공의 존재를 묘사합니다. 이러한 냉소적 서술은 나중의 소설에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꾸밈없이 서술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만약 작가가 주인공의 좌절을 이른바 유대주의의 합목적성이라는 질식할 것 같은 편협성의 관련 속에 다루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몇몇 비평가가 주장한 바대로 유대인 작가의 반유대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포트노이의 보고는 유대주의 내지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가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유대주의의 강령과 윤리 그리고 이에 종속할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의 안타까움과 탄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로스의 작품에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유대인의 입장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가령 포트노이는 심지어는 자신의 애인, 비유대인 처녀인 메리 제인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립을 고찰할 때 주인공의 삶의 보고서는 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