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헨릭 입센, 방랑의 작가

필자 (匹子) 2021. 5. 17. 19:05

   

 

 

헨릭 입센 (1828 - 1906)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소문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텔레마크 지역의 상인이었으며, 그의 아래에는 세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입센이 8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크리스티아니아 근교의 그림스다드에 있는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입센은 내향적이고 우울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하여 술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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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입센은 16세의 나이에 약사 라이만의 집에서 약사 업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잠시 일하기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틈틈이 셰익스피어 등의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클라라라는 이름의 처녀를 사랑했고 연애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밖에 입센은 자신보다도 10세 나이 많은 하녀와 눈이 맞아서 살을 섞었는데, 하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는 한스 야콥 헨릭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입센은 결혼식을 치르지는 못하더라도 양육비만큼은 부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아들과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자 마르쿠스 타라네 (1817 - 1890). 그는 노르웨이의 선거권 개혁을 위해서 노력하였고, 개개인의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위해 노력하였다. 

 

입센은 그림스타드를 떠나기 전에 극작품 카틸리나를 가명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에 완성되었는데, 작품 발표를 통해서도 그다지 커다란 보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1850년부터 입센은 (오늘날 오슬로에 해당하는) 대도시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그는 이상적 사회주의자 마르쿠스 타라네 Marcus Tharane가 이끄는 노르웨이 노동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밖에 입센은 여러 단체에 참가함으로써 많은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우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주간 예술 잡지를 간행하면서 북구의 신화 그리고 민속학을 탐구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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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입센은 베르겐에 위치한 노르스케 궁정 극장의 전속 극작가로 초대받았습니다. 극장으로부터 지원금을 수령하는 대신에 매년 노르웨이 인민 극장을 위해서 극작품을 완성하는 게 그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제법 많은 작품들이 완성되었습니다. 입센은 1857년까지 이 일을 맡아서 일했습니다. 1852년에 입센은 독일과 덴마크의 극장의 여러 가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코펜하겐과 드레스덴으로 연구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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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의 언어 체계.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알파벳이 상용화되기 전에 상기한 기호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1857년 입센은 크리스티아니아의 노르스케 극장을 인수하여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858 수잔나 토레센이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내인 수잔나 토레센 (1832 - 1914). 그미는 "비논리적지만, 강한 시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소한 일에 개의치 않는 대인배"라고 했다.

 

그러나 입센은 1864년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르웨이를 떠나, 27년 동안 외국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1862년 노르스케의 극장 운영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졌습니다. 1862년 자신의 극작품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돈으로 인한 고향 사람들과 갈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입센은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처제를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를 매우 질타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덴마크는 독일과 전쟁을 치렀는데, 노르웨이는 수수방관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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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은 처음에는 비요른손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스로 작품을 집필하여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입센이 처음에 머문 곳은 이탈리아의 모라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드레스덴 그리고 뮌헨에 체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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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풀친 Alexander Polzin이 2011년에 그린 유화 페르귄트

 

  

사실 입센의 대작들은 망명 기간 동안에 탄생하였습니다. 페르귄트는 187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그Grieg의 음악과 함께 공연되었는데, “노르웨이의 파우스트라는 놀라운 평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입센은 자신의 작품이 너무 낭만주의의 분위기에 의해 포장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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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1879년에, “유령1881년에, “들오리188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적 삶 그리고 그 비극을 더욱 강하게 다루었습니다. 개인의 비극은 과거 체험에서 비롯하는 어떤 실수 내지 잘못에 의해 순간적으로 출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대 비극과는 달리 비극은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 책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정하였습니다.

 

입센의 극작품은 특히 자연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어떤 놀라운 계기가 사건의 진행과정 속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어 등장인물들을 경악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은 입센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곤 합니다. 그럼에도 입센의 작품들은 분석극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사회극은 때로는 여러 가지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작품 유령은 혼외정사 내지 성병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상영금지 조처를 당했습니다.

 

입센은 1891년에 27년의 자발적인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옵니다. 70세의 생일에 노르웨이와 독일의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상을 수여하였습니다. 그해에 처음으로 전집도 간행되었습니다. 1901년 감자기 그에게 마비 증세가 찾아와서 몸의 반을 못쓰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 침대에서 생활하던 그는 1906523일에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나의 귓전에 맴돕니다. “글쓰기는 내가 고해하는 행위와 같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법적 심판대에 올려놓고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글을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