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 (1)

필자 (匹子) 2021. 9. 10. 10:55

1. 세계 국가 유토피아: “극단의 시대” (홉스봄), 20세기에 이르면 19세기 유토피아의 특성들은 현저하게 사라지고, 대신에 세계 국가에 관한 광범한 유토피아의 구상이 출현합니다. 우리는 허버드 조지 웰스 (Herbert G. Wells, 1866 – 1946)의 『모던 유토피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웰스는 세계 국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고 시도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대도시, 인구 성장 그리고 사회적 전문화 과정은 이전보다 더 폭넓은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유토피아의 유형 역시 이와 비례하여 확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웰스의 유토피아는 역동적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웰스가 세계대전의 징후를 간파하지 않았더라면, 역동적으로 변화되는 유토피아의 모델을 설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유토피아는 웰스에 의하면 하나의 정태적인 “성citadels”이 아니라, 마치 “배 ship”와 같은 형태로 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McLean: 151). 그의 첫 작품 『타임머신』이 배의 형태로 축조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Wells 1904: 14). 그만큼 웰스는 과학자의 시각에서 모든 사항을 역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려고 했습니다. 가령 기찻길, 자전거도로, 고속도로, 보행로, 자동차 전용 도로, 뱃길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이 만들어져서 인간이 이동하고 여행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로 웰스는 기상천외한 관점에서 우주와 미래를 상상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세계 국가가 건설되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은 종식되리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시스템이 통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으로 모든 전통과 관습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웰스가 자신의 유토피아를 세계 국가로 설정하고, 사무라이라는 엘리트 그룹으로 하여금 관료주의 정치를 시행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2. 다재다능한 작가, 허버드 조지 웰스: 웰스는 사이언스 픽션 문학의 선구자이며, 동시에 유토피아 문학의 저자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소설 집필 외에도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미래학자로서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웰스만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많은 사이언스 픽션을 창안한 작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는 소설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비판의 글들, 전쟁에 관한 수많은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쥘 베른,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과 함께 “사이언스 픽션의 아버지”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두 개의 세계대전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그의 관심사는 “오래된 미래”를 추적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인류의 은사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세계적 명성은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스는 약 53년 동안 평균적으로 일 년에 두 권의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잡문과 저널리스트로서의 논평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1946년 웰스가 사망했을 때 그는 도합 114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웰스의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발표되었다고 말입니다.

 

3. 웰스의 삶 (1):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작품을 발표하게 했을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웰스는 1866년 9월 21일 런던의 브롬니 켄트에서 어느 가난한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하층민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웰스가 태어난 1866년은 영국에서 산업화로 인하여 여러 가지 재앙이 속출하던 시기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린 빈부 차이였습니다. 당시에 사업가는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의 경제적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광산 개발과 공업 육성으로 자연이 피폐하게 되었고, 슬럼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웰스의 부모는 하층민 출신이 아니었으나,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왕년에 크리켓 선수였는데, 상점을 차려서 스포츠 용품, 그릇 등을 팔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지 못해서 어머니는 남의 집 하녀로 일해야 했습니다. 웰스 역시 포목상의 도제로 일했지만, 별반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웰스는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이를 충족시킬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1873년부터 1879년까지 모를리 아카데미 학교에 다녔으나, 1880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면직물 상인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면직물의 도제로서 일하는 것은 웰스에게 너무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열악한 노동 조건 그리고 쥐꼬리만큼 작은 임금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결국 도제의 일을 도중에 그만두었으나, 생계를 위해서 이듬해에 다시 면직물 상인에게서 계속 장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4. 웰스의 삶 (2): 하루 13시간의 노동, 적은 액수의 임금, 더러운 숙소 게다가 사장의 권위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웰스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보냅니다. 이러한 고통은 결국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이 삶의 위기를 넘기도록 도와준 것은 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어진 삶에 대한 불만을 보상해준 것은 문학 작품들이었습니다. 호손, 유진 수Eugèn Sue, 새뮤얼 존슨, 조나탄 스위프트 등의 작품들은 그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1882년에 웰스는 미드허스트 그래머 스쿨에서 조교로 일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 지역에 있는 과학 재단의 장학금을 받습니다. 웰스가 1884년부터 1887년까지 런던의 과학 사범학교에서 지리학, 생물학, 천문학, 천체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그를 가르친 사람은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한 생물학 교수, 토머스 헉슬리였습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웰스의 관심은 두 가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문학이었습니다. 당시 웰스는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블레이크 그리고 칼라일의 작품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촌누이동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Saage 26). 누이와의 밀회는 처음에는 성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는데, 나중에는 깊은 사랑으로 발전되어, 결혼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웰스는 결혼 후에도 수많은 여성들과 성을 탐하였는데, 이는 어쩌면 사회에 대한 내적 저항감과 관련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저항감은 권위적인 것, 지리멸렬한 것, 기성세대의 고루한 풍습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5. 웰스의 삶 (3): 1887년 웰스는 대학을 마치지 않고 방황하다가, 나중에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는 어느 사립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아서 일했으나, 심한 질병이 수년간 그를 괴롭힙니다. 취업은커녕 습작조차 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어느 대학 부설 학교의 생물 교사로 취직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면하게 됩니다. 웰스는 사회적 참여에 대한 열기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찾은 것은 페이비언 협회였습니다. 1891년에 이르러 웰스는 경제적 어려움을 떨치게 되었을 때 꿈에 그리던 누이인 이사벨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혼 후에 수많은 여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어쩌면 건강 악화로 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찾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웰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여고생 제자를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미는 아미 캐서린 로빈스였는데, 웰스의 방종한 성생활을 처음부터 용인하는 편이었습니다. 웰스는 캐서린의 도움으로 작품 집필에 몰두하게 됩니다. 1895년에 그는 이사벨과 이혼하고, 캐서린과 결혼하게 됩니다. 웰스는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동조하였고, 전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창조력을 자랑하는 다작가였으며, 정치 및 사회를 내용으로 하는 비평문 내지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웰스는 말년에는 사회의 중간계층 내지 소시민의 문제점을 자주 다루곤 하였습니다. 그의 소설의 주제는 무척 다양합니다. 어쩌면 그가 찰스 디킨스의 후계자라고 명명되기를 갈구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