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극의 작가, 하이나르 킵하르트 (Heinar Kipphardt, 1922 - 1982)는 대표작 『로베르트 오펜하이머 사건에 관하여 (In der Sache Robert Oppenheimer)』를 60년대에 발표했다. 원래 이 작품은 방송 시나리오로 작성되어, 1964년 1월 23일에 독일에서 방송되었다. 나중에 킵하르트는 극작품으로 각색하였다. 극작품은 1964년 10월 11일 베를린과 뮌헨에서 동시에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1954년 미국의 원자에너지 위원회가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취조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자연과학자 한 사람을 보호하며, 그를 둘러싼 의혹을 풀기 위해서 개최되었다.
오펜하이머는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에 있는 핵 연구소에서 (이곳에서는 첫 번째 원자폭탄이 발명되었다.) 수소 폭탄의 제조 작업에 몰두했다. 당국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이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느릿느릿 작업하여, 수소폭탄의 발명을 지연시켰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에 대한 심문은 1954년 5월, 한 달 동안 이루어졌다. 조사위원회는 모든 심문의 과정을 약 3000페이지 가량의 조서로 발표하였다. 극작가, 킵하르트는 이 문헌을 작품의 토대로 삼고 있다. 작품이 실제로 발생했던 대화 등을 빠짐없이 반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극작가는 작품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는 반면에, 수많은 세부적이고도 지엽적인 사항들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조사위원회는 한 달 동안 자연과학자 오펜하이머의 경우를 심의하면서, 약 40명의 증인들과 대화를 나눈 바 있다. 작품은 총 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장면 사이에 어느 화자의 요약문이 삽입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요약문들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심히 유감스럽다. 중요한 것은 심문 내용 자체가 아니라, 심문 과정에서 나타나는 위원회 사람들과 오펜하이머 사이의 의견 대립이기 때문이다.)
심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요약되고 있다. 즉 오펜하이머가 처음에 공산주의 단체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 어째서 그가 나중에 공산주의의 시스템으로부터 등을 돌렸는가? 오펜하이머는 어떠한 목적으로 미국의 비밀 군사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경악에 사로잡혔는가? 하는 물음들이 그 질문들이다.
이러한 질문에서 오펜하이머가 적국을 이롭게 했다는, 이른바 간첩 혐의가 드러난다. 가령 오펜하이머는 1936년에 스페인 내란 당시에 프랑코 독재에 반대하며, 공산주의의 지조를 지닌 공화주의자들에게 매달 300달러를 송금하였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동생은 공산당의 열렬한 당원이라는 게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지조 때문이 아니라, 혈족이라는 이유에서 동생을 두둔하고 도와준 바 있다.
상기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오펜하이머의 간첩 혐의는 명확한 사실로 밝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백일하에 밝혀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과학자의 애국심 그리고 완전한 비밀 보장 등에 관한 물음이다. 그런데 심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 이슈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즉 수소폭탄 제조와 관련되는 오펜하이머의 소극적인 연구 자세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적 좌파 사람들과 연루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그게 연루되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가설은 사실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1948년에 이미 수소 폭탄의 제조가 가능했는데도, 그가 일부러 연구를 지연시켰다는 가설 말이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조사 위원회로부터 어떠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심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양심적인 갈등은 당국이 요구하는 충성보다도 더 깊은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과학자가 무엇보다도 국익을 위해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 전체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놓고 깊이 고심했다.
오펜하이머는 마지막에 자신을 옹호할 기회를 얻는다. 그의 발언 내용은 증인으로 출두한 동료, 에드워드 텔러의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가령 에르워드 텔러의 견해에 의하면 “도덕적” 그리고 “부도덕적”이라는 카테고리는 자연 과학 내지 기술 발전의 영역에서 전혀 쓸모없다고 한다. 왜냐면 자연과학에서 성취해내는 기술은 마치 잘 드는 칼과 같아서, 사람이 어디에 적용하는가에 따라 때로는 살인 무기로, 때로는 유익한 도구로 활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위원회 여러분들과는 달리, 나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 물리학자들이 어떤 너무나 크고도 결코 검증될 수 없는 충성심을 보이는 게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충성심은 내가 처해 있는 수소폭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의 우리의 더 나은 견해와 전적으로 어긋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악마의 작업을 행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작업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이나 킵하르트는 이른바 “기록극 (Dokumentarisches Theater)”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서, 극작가의 전통적 역할을 가장 작은 것으로 축소화시켰다. 물론 문학 텍스트가 하나의 “문서 (Dokument)”와 전적으로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킵하르트는 “기록극의 극작가는 객관적 사실 전달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내적 갈등을 교묘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의 사항을 유추하게 한다. 즉 실제 현실과 문학적 현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항 말이다. 한마디로 기록 문학은 수많은 사실적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문학일 뿐, 사실적인 르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킵하르트가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건에 관하여」를 집필할 무렵,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극작가는 자신의 작품 초고를 오펜하이머에게 직접 보여주며, 조언을 청하였다. 이때 자연과학자는 여러 가지 수정 사항을 제안하였다. 극작가는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작품을 가필 정정하였다. 문제는 수정작품 역시 오펜하이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연과학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킵하르트를 상대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작품은 감추어져야 할 자신의 삶을 백일하에 까발리고, 자신의 명예를 손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프랑스 연출가 장 비야르 (Jean Villar)는 킵하르트의 작품을 대본으로 하여 작품을 마구 고쳐, 파리에서 공연하게 했다. 이때 그는 “킵하르트의 작품을 대본으로 삼았다.”라는 말을 생략했다. 이때 킵하르트는 비야르의 표절 혐의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비야르는 오펜하이머를 다만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이는 그의 의도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나중에 비야르는 모든 것을 인정하며, 자신의 대본이 킵하르트의 원전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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