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을 다루는 연극의 형식적인 문제에 관하여 프리드리히 볼프 (1888 - 1953)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 - 1956)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대화는 1952년에 구동독의 연극 잡지 「연극 작업 (Theaterarbeit)」에 실린 글인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발췌된 것입니다.
......................
볼프: 우리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서로 다른 연극계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서 서로 다른 극장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당신의 「억척 어멈」은 아주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극적 수준을 고려할 때 당연한 귀결이라고 사료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연극을 애호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당신의 연극론에 관한 어떤 폭넓은 대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됩니다.
당신은 「억척 어멈과 그 아이들」을 우연히 “연대기”라고 명명한 게 아니라, 이로써 분명히 당신의 “서사극”이라는 형태를 드러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사실 그것도 오로지 사실만을 관객에게 전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연대기적인 문체를 강조했습니까?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가능한 사실들로 이해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거칠게 말해 봅시다. 당신은 객관화시키는 연극 그리고 심리적으로 전환시키는 연극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이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대가로써...
브레히트: 연대기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 연대기라는 표현은 장르에 합당하게 엘리자베트 시대의 연극에서 사용되는 역사 (history)라는 표현과 일치합니다. 물론 그것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어떤 무엇에 대한 어떤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정당하게 언급했듯이 사실 자체가 순수한 상태만으로써 무언가를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로써 유혹 당하는 사람은 불과 소수일 테니까요. 연대기가 실제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필요합니다. “객관화시키는 연극 그리고 심리적으로 전환시키는 연극”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객관화시키며 동시에 심리적으로 전환시키는 연극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심리적인 소재는 예술적 표현의 주요 대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기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대기가 관객을 객관성의 상태 (다시 말해서 찬성이냐, 반대냐 등과 같은 열정 없는 숙고) 속으로 향하게 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연대기는 관객을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볼프: 당신의 연극은 무엇보다도 관객의 인식 능력을 일깨우려고 호소합니다. 당신은 우선 주어진 혹은 가능한 상황 (사회적 실제 상황)의 관련성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일깨우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관객은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동일한 방법으로 감정, 정서 -예컨대 정의의 감정. 자유에 대한 열망, 억압자에 대한 “구원적인 분노” 등- 등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합니까?
나의 질문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단순히 설명을 요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예를 들면 「괴츠 폰 베르히링엔」 등과 같은 역사적 연대기를 오늘날의 관객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아시겠지만, 괴츠의 성격은 어떤 발전, 변환 그리고 순화 등을 체험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정서적 체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미 히틀러 시대에 왜곡되고 거짓된 정서들이 마치 눈사태처럼 마구잡이로 비난 당한 바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연극 속에 나타나는 정서적 요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혹의 대상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브레히트: 서사극이 (지금 이미 드러난 것처럼 그렇게) 연극적 특성을 담지 않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여기서는 이성이 중요하고,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 등과 같은 대립적인 전투적 외침은 서사극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연극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정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의에 대한 느낌, 자유에 대한 열망, 정당한 분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극은 이러한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극은 기존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고 창안해야 할 정도이니까요. 서사극의 관객이 지니는 “비판적 태도”는 다만 기존의 방법으로는 관객에게 충분하지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볼프: 당신은 (서푼짜리 오페라 그리고 억척어멈 등의) 개별적 장면 사이의 막간극의 텍스트에서 관객에게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미리 들려주게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의도적으로 극적 긴장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또한 이로써 당신은 정서적 체험을 포기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객의 인식 능력을 일깨우기를 갈망하는가요? 그렇다면 여기서 극장 내에서의 어떤 의식적인 결과가 존재할 수 있지요.
느슨한 행위 없는 인식, 유희하는 자와 배우 없는 인식, 인물의 변화 내지 발전이 없는 인식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햄릿, 오델로, 간계와 사랑 등을 생각해 보세요. 극적인 긴장 요소 (발단, 매듭의 얽힘, 전개 놀라운 결과 등) 등은 당신의 연극론에 의하면 어떻게 평가됩니까?
브레히트: 긴장 놀라움 등이 극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관해서 짤막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오래된 테마 “발단 전개, 절정 그리고 대단원” 등은 역사극, 가령 「괴츠 폰 베를리힝엔」 그리고 「요한 왕」 등에서도 도외시된 적이 있지요. 성격의 변화와 발전은 여전히 서사극에도 나타납니다. 비록 내적인 커다란 변모 혹은 인식에로의 거대한 발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리얼리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 존재에 의해 규정되고, 이것을 극적으로 조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극의 유물론적 작업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볼프: 바로 “억척 어멈”에서 당신은 서사극의 양식을 집요하게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이는 관객의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지요. 이야기의 정서적 요소는 공연의 정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벙어리 카트린이 북을 치는 장면, 첫째 아들의 죽음, 어머니가 저주받을 놈의 전쟁! 하고 외치는 모습에서 정서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형식을 통해서 멋지게 상현할 수 있는 서사극 요소가 바로 내용에 의해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내 질문은 다음과 같아요. 억척 어멈이 (가능하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쟁은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는다.” 라는 인식에 도달한 뒤에, 다시 말해서 그미가 물건만 잃는 게 아니라 자식까지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첫 번째 장면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
친애하는 브레히트, 내 생각에는 바로 여기서 (억척 어멈이라는 놀라운 공연 그리고 극작품 상연 너무나 유혹적으로 훌륭한 공연의 경우) 그리고 당신의 의미에서 고찰할 때,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물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은 연극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을 변화시키려고 하지요. 무대 위에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인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극작가의 마지막 목표일 것입니다.
(...) 우리 독일 연극은 꼭 필요한 무엇을 어떻게 인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전쟁에 대항하여 인민들이 지니고 있는 숙명론을 어떻게 자극할 수 있을까요? 만약 억척 어멈의 말 “저주받을 놈의 전쟁!”이라는 말이 어떤 가시적인 표현으로서의 행위로 나타나 관객이 이에 대한 인식을 도출해내었으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레히트: 당신이 정확히 말하신 극작품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억척 어멈은 자신에게 당면한 파국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이 작품은 1938년 집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극작가인 나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을 미리 보았던 것이지요. 극작가인 나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견해에 의하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언가 배울 수 있으리라고는 확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프리드리히 볼프, 당신의 말은 극작가가 리얼리스트였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다음의 가설을 시사해 줍니다. 만약 억척 어멈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관객은 내 견해에 의하면 무언가를 배우리라는 가설 말입니다.
어떤 예술적 수단이 선택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우리 극작가가 우리의 관객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비약시키고 자극시키는가 하는 물음과 통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모든 생각할 수 있는 예술적 수단들을 모조리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말입니다.
'46 Brec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브레히트의 품위 없는 노파 (0) | 2021.05.15 |
---|---|
서로박: 브레히트의 '유대인 창녀 마리 산더스에 관한 담시' (0) | 2021.03.24 |
브레히트의 "유혹에 대항하여" (0) | 2020.09.26 |
서로박: 브레히트의 코카사스의 백묵 원 (0) | 2020.09.01 |
브레히트의 사랑 (0) | 2020.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