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필자 (匹子) 2019. 3. 18. 11:11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인 허버드 마르쿠제 (1898 - 1979)의 "에로스 그리고 문명 Eros and civilisation)"은 문화 철학 내지 정신분석의 연구서로서 1955년 미국에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30년에 쓴 후기 저작물 「문화 속의 불만 (das Unbehagen in der Kultur)」에서 개진한 문화 철학 내지 사회 철학 분야의 입장에 대한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이 든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대중 심리학과 자아 분석 (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 "쾌락 원칙을 넘어서 (Jenseits des Lustprinzips)" 그리고 "자아와 이드 (Das Ich und das Es)" 등의 작품에서 이른바 대중의 복합적 심리 구조 및 죽음 충동 등을 추적한 바 있다. 이에 상응하여 마르쿠제는 전체주의적 자동화의 경향을 띄고 있는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와 관련하여, 프로이트의 충동 이론을 새로운 각도로 해명하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자유로운 충동 성취 그리고 이러한 충동에 대한, 사회의 필연적 조종 사이에 도사린 모순을 지적하였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억압의 역사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는 사회적 존재 뿐 아니라, 생물학적 존재를 꽁꽁 묶어두고 있다. 현재의 문화는 마르쿠제에 의하면 인간 존재 및 충동 구조 자체를 모조리 강요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에로스 뿐 아니라, 이와는 정 반대되는 죽음 충동 역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한다. (가령 우리는 여기서 급속도로 발달한 전쟁 산업의 기술 등을 상정할 수 있다.) 문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목표, 다시 말해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성공리에 포기하는 바로 그것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한, 마르쿠제의 주장은 프로이트의 그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르쿠제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실 원칙”을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실 원칙은 사회적 필연성에 의해서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충동적 “쾌락 원칙”을 조종해 왔으며, 지금도 조종하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 원칙은 문화에 기여하는 기능을 담당한 다. 마르쿠제는 한편으로는 “개체 발생사적으로 (ontogenetisch)” 개개인의 억압을 해명한다. 즉 개개인은 사회의 필연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충동을 승화시키거나, 충동 만족을 나중으로 미루어야 한다. 다른 한편 “계통발생사적으로 (phylogenetisch)” 마르쿠제는 에로스의 억압을 설명한다. 즉 억압 구조의 인류 문화는 원래 이성과 감각, 다시 말해서 유용함을 가져다주는 노동과 성적 욕망, 즉 에로스의 쾌락을 서로 구분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쿠제의 입장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에로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개인의 욕망 성취를 이른바 물질적 재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억압과 화해시킬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는 억압되지 않는 개인적 충동의 가능성 내지 강요받지 않는 문화 발전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욕망 충족과 문화적 필연성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 내지는 모순 구조는 마르쿠제에 의하면 극복 가능하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상기한 입장은 마르쿠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첫째로 문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입장 자체가 억압 없는 어떤 문화의 역사적 가능성을 수미일관 반박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20세기 이후로 진척된 자유주의적 사고 내지 여성 해방의 경향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 마르쿠제에 의하면 억압 문화 자체가 성취해낸 성과들이 오히려 억압의 철폐를 점진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고 한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화된 사회”의 가능성 내지 억압받지 않는 충동들의 발전 등을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충동들은 성적 충동에 해당하는 에로스 뿐 아니라, 죽음 충동 내지 파괴 충동에 해당하는 타나토스 역시 가리킨다.) 이러한 사고는 “현실 원칙을 넘어서”에서 자세하게 개진되고 있다. 마르쿠제는 현재 유효한 “현실 원칙”을 쾌락 원칙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사회는 개개인의 충동의 억압을 통해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위해서 개개인의 욕망은 차단되고 억압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현대 산업의 고도 기술은 노동 시간의 단축을 허용하고, 개개인들은 자유 시간에 전인적 교육이라든가,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양의 철학은 이른바 “성취 원칙”과 일치되는 이성의 개념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화해 등을 발전시켰다. 특히 예술 영역은 마르쿠제에 의하면 사회적 강령에 의해 터부시되었던 “자유의 원초적 상”이라는, 결코 왜곡될 수 없는 표현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판타지와 상상력은 결코 임의로운 영혼의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각과 이성 사이의 구분을 극복하게 하고, 인간에게 자신의 고유한 인식 능력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예술과 예술 체험은 노동의 분화 그리고 인간 소외와는 정 반대되는 체험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마르쿠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개개인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삶의 비중을 축소화시킴으로써 성적 에로스의 충동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 자체는 무조건 거부되고 약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간은 자신에게 합당한 창조적 노동을 개발함으로써 노동 행위를 에로스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는 자유 시간 외에, 다시 말해서 노동 시간 내에서도 성취를 위한 심리적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일하는 행복의 자유를 만끽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로써 죽음 충동 역시 일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취한 삶 이후의 자연스러운 죽음은 고통과 고생스러운 삶이 가져다주는 비참한 죽음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 "에로스와 문명" (김인환 역)은 최근에 나남 신서에서 다시 간행되었는데, 여전히 가독성에서 문제가 있다. 독어판, 영어판 그리고 불어판의 대조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