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비련의 유대 민족 (3)

필자 (匹子) 2023. 3. 25. 09:42

나치 청산은 동서독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독은 그나마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서 전범자들 그리고 히틀러 추종자를 처벌했으나, 동독에서는 이러한 재판조차 거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후 사회의 복구를 위해서 소련 군정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발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얼마나 나치에 동조했는가? 하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에 히틀러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사진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모습이다. 미군정은 전쟁 범죄자를 네 등분으로 나누었다. 1. 히틀러 정권에 충성하며 죄를 지은 1급 전범 (히틀러 치하의 장성, 정치가 등), 2. 나치 정책을 직접 수행하여 유대인을 학살한 2급 전범 (독일 장교들), 3.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탄압한 독일인 (독일 병사), 4.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동조한 사람들 (일반인들) 미군정은 중죄인들에게는 엄벌을 내리고, "단순동조자들 Mitläufer"에게는 훈방조처를 취했다.

 

 

 

 

 

실패는 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실패는 어떤 교훈을 안겨준다. 그것은 더 이상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리킨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차별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행해지지 않았다. 독일의 심리학자 알렉산더미첼리히는 "슬퍼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서 독일인들의 망각 신드롬을 지적하였다.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다음에 과거의 죄악에 관해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독일인들은 대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망각하거나vergessen, 의식적으로 지우려고verdrängen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살아가던 대부분의 경우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시오니즘 Zionismus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서독에서 그리고 동독에서 어떠한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 서독 사람들은 나치 범죄에 대한 죄를 망각하거나, 의도적으로 뇌리에서 지우려고 하였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네오나치로 거듭나서, 서독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위협하곤 하였다. 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동독 정부는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면서, 유대인의 편견을 모조리 없앴다고 공언했지만, 속으로는 유대인 그리고 유대주의를 경멸하곤 하였다. 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것은 마치 일본이 정신대에 끌려간 여성들에게 경제적으로 보상하지 않은 경우와 맥락을 같이 한다. 

 

 

 

 

위의 그림은 고 강덕경 할머니가 엽서 그린 빼앗긴 순정이라는 작품이다. 일본은 각처의 한국 처녀를 잡아다가,  정신대에서 강제로 일하게 하였다. 그들의 몸은 불과 며칠만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상처입은 마음은 평생 가슴속에 대못을 박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사람들은 정신대에 끌려간 처녀들을 "창녀들"이라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지금도 정신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한반도의 독도를 노리고 있다.

 

 

 

그래, 서독과 동독에서 진정한 의미의 파시즘 청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 3제국 시대에 히틀러 앞잡이로 일했던 사람들은 특히 동독에서는 처단되지 않았다. 소련 군정은  오로지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을 경우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노동자, 공무원으로 발탁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50년대 남한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몇몇 제헌 국회의원들은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일제의 압잡이를 색출하여,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친일파 매국노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내세우며, 국회의 반민 특위를 해산하게 하였다. 이로써 친일파의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지 않았고, 친일파의 재산은 기득권 고위층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독일운동가는 해방이 되어도 여전히 핍박당하면서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들은 사회의 상류층으로 버젓이 남게 되었다.   

 

 

 

 

위의 사진은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대학살 Holocaust"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시관이다. 자고로 우리는 사람을 용서하되,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사악한 범죄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린다. 그것은 더 이상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경고를 가리킨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동독과 서독에서 나치 앞잡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낙후한 경제 사정만 복구하면 좋다는 식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죄는 아버지 세대에서 저질러 놓고, 이에 대한 책임을 자손이 져야 한다는 것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고 독일전후세대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후 사회에서 나치 전범을 처형하는 사건이 단 한 번 발생하였다. 1961년 이스라엘의 정보원들은 아르헨티나로 가서 그곳에서 숨어 살고 있는 루돌프 아이히만을 비밀리에 체포하였다. 아이히만은 독일군 장교로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아이히만은 창졸지간에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 유대인 출신의 지식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이라는 책을 통하여, 아이히만이 어떠한 재판 과정을 거쳐서 처형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이히만 재판의 증인이 되어, 모든 재판 과정을 기록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처음에 그미는 아이히만이 당연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입장은 아이히만과의 접견 이후에 서서히 바뀌어간다. 무조건 아이히만을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응에 놀라워한다. 그것은 사악함에 대한 분노,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분노와 노여움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독일인들의 전쟁 참여의 필연성을 외치는 광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접견한다. 이때 그미는 아이히만이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노예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그미의 견해에 의하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아무 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 그저 상사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충직한 개와 같은 존재였다. 한나 아렌트가 이러한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의 관심사는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 아이히만이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가? 유대인을 죽일 때 그의 뇌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죄악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 심리적인 계기를 파악하는 게 한 인간을 처형시키는 것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판정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로지 외적인 처벌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음을 클릭하면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한나 아렌트의 한 장면.

http://www.trailerseite.de/film/13/hannah-arendt-kino-trailer-25131.html

http://www.youtube.com/watch?v=WTQNWgZVctM

 


'12 세계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상상력과 비판  (0) 2023.05.11
콩 심은 데 콩 나는가?  (0) 2023.03.31
비련의 유대민족 (2)  (0) 2023.03.25
비련의 유대민족 (1)  (0) 2023.03.25
담배, 잎담배 그리고 대마 (2)  (0)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