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레티프의 남쪽 지역의 발견 (1)

필자 (匹子) 2022. 9. 26. 06:51

1. 레티프의 유토피아: 미리 말씀드리자면, 니콜라스-에듬 레티프 드 라 브레톤의 유토피아 모델은 “고결한 야생”이라는 자연친화적 요소 그리고 고전적 유토피아에서 나타나는 기하학적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는 제도적인 틀 내지 국가의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무위를 지향하는 반-국가주의의 체제라면, 후자는 바람직한 국가구도를 처음부터 인정하는 체제로서, 모어 이후의 유토피아에서 끊임없이 계승된 바람직한 이상 국가의 상입니다. 따라서 레티프 유토피아는 거시적 측면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특성을 혼합시킨 모델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피네 섬, 크리스틴 섬 그리고 “메타페타곤”이라는 세 가지 사회 유토피아의 모델로서 작품 속에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2. 자유분방한 다작의 작가: 레티프가 1806년 2월 3일 파리에서 쓸쓸하게 사망한 지 5일 후에 파리의 어느 잡지는 일요일 특집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레스티프는 평생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삶 자체가 마치 하나의 슬픈 소설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삶의 열정을 지녔지만 동시대인들은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면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위대하고도 끈덕진 작가는 죽는 시점까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엄청난 집필 욕구와 성욕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엄청난 갈망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그칠줄 모르고 솟구쳤는지 모릅니다.

 

레티프는 39년 동안 약 57,000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습니다. 113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전집이 간행된 시점은 1987년과 1988년, 그러니까 사후 180여년 만이었습니다. 냉정하게 고찰할 때 엄청난 다작 행위는 그의 문학적 평가에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였습니다. 나아가 작가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죽은 뒤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혹자는 그를 “음탕하고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악랄하게 폄훼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의 문학을 “근대 유럽의 어둡고 추악한 측면을 재현시켜준 유일한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3. 레티프는 심리적 질병을 지니고 있었는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즉 레티프의 문란한 성생활이 그의 문학의 전체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소로 작용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회적 금기에 개의치 않으면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유품에 해당하는 메모장을 살펴보면, 레티프는 평생 300명 이상의 애인과 정을 통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주위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의 정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딸, 에네 Aînée와의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패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엽색행각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문학 연구자들은 레티프에게서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의 병적 요인이 잠재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레티프 드 라 브레톤은 여성의 신체 가운데 특히 하복부와 다리에 집착하였고, 유독 여성들의 신발들을 수집하며, 그것들을 마치 신처럼 숭배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병행하여 레스티프의 인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심리적 질병의 요인은 이를테면 “과도한 성욕”, “거짓 욕구” 그리고 “과도한 자신감의 광기”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Saage: 200).

 

4.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사랑과 자연적 삶의 이상: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가령 사드 백작이 『저스틴』(1798)에서 음습한 변태성욕을 서술한 데 비하면, 레티프는 폭력과 인위성이 없는 성의 향연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문학작품은 남자와 여자가 수치심 없이 즐기는 성의 축제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도시든 시골이든 간에 평민 내지 하층민의 꾸밈없는 성욕을 문학적으로 발산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몰락한 농부 Le Paysan』(1775), 『파리의 여러 밤 (夜) Les Nuits de Paris』(1788/ 1794) 등의 작품은 겉으로는 진득한 육체적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저변에는 어떤 묘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레티프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즉 18세기 후반부의 파리에 거주하는 독자들은 이로케스 인디언들의 관습과 성생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프랑스 시골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레티프는 자신의 사회적이며 민속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앙시앵레짐 하의 사회적 현실을 전해줌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유도하였습니다. 도시의 문명은 작가의 눈에는 부패하고 몰락한 것으로 비친 반면에 농업 중심의 조합의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둔 시골의 삶이 어떤 이상으로 투영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상은 레티프의 여러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5. 작품 『남쪽 지역의 발견』의 빈응: 특히 레티프의 소설, 『비행하는 남자, 혹은 프랑스의 새로운 다이달로스에 의한 남쪽 지역의 발견 La découverte australe par un homme-volant, ou le dédale franςais』(1781) 역시 부패한 도시의 정치적 술수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동시에 시골의 꾸밈없는 자연의 삶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럽에서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서술 자체가 진지함과는 거리감을 지니고 있으며, 소설의 화자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독자들은 레티프의 작품에서 어떤 장점 내지 독창성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는 놀랍게도 사회주의의 사상적 분위기가 드러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레티프는 계몽주의 마지막 세대의 희망을 담고 있으며, 『남쪽 지역의 발견』은 혼자 힘으로 모든 지식을 쌓았던 작가의 기발한 꿈과 상상을 진솔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급진적 자세로 주어진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의 공동적 삶에 관한 이상적 모델을 설계하게 하였을까요?

 

6. 레티프의 삶 (1): 레티프 드 라 브레톤은 1734년 10월 23일 부르고뉴의 오세르 근처에 있는 사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위에서 평판이 좋은 농부였는데, 1740년에 영지, 델라 브레톤을 구매하였습니다. 그래서 레티프는 1746년까지 그곳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그는 어린 시절에 영특하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은 그가 종교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형, 토마스는 어느새 비세트르에 있는 장세니즘 수도회의 신부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동생인 니콜라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장세니스트들이 종교적 탄압으로 다른 곳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레티프는 어쩔 수 없이 코르지에 있는 신부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신부 학교에서 일하는 어느 여선생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선생과의 염문설은 순식간에 학교 전체로 퍼져서,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인 사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레티프는 오세르에서 인쇄술을 배워서, 출판업자가 되기 위해서 파리로 떠납니다. 간간이 시골에 머문 적을 제외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저주스럽고도 애틋한 도시, 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7. 레티프의 삶 (2): 인쇄업에 종사하던 레티프는 1760년도 중반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몇 년 전에 그는 아그네스 레버진이라는 여성과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남편의 습작 생활과 난봉 짓거리에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느끼다가, 1785년에 그미는 부정한 남편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시골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며 살아갑니다. 레티프는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여 하룻밤의 사랑을 즐깁니다. 때로는 한 여성과의 사랑이 몇 달 동안 지속되기도 합니다. 여성들과의 수많은 경험은 자신의 소설 속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사실 시골 출신의 글쟁이가 대도시에서 살려면 최소한의 생활비가 필요했는데, 그가 신경을 쓴 것은 기껏해야 빵 몇 조각, 집필행위 그리고 여성과의 짜릿한 데이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물질적으로 궁핍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레티프는 무산계급에 속했습니다. 주어진 처지에 불만스러워하며, 초조함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루소와 같은 명망 있는 철학자들에게 경탄을 터뜨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시샘하기도 하였습니다. 레티프는 마치 자신이 루소라도 되는 듯이 수미일관 계몽주의 운동에 동조하였고, 인간의 자발적인 삶을 옥죄이고, 모든 것을 제도화하는 권력 단체에 대항하곤 하였습니다.

 

8. 레티프의 삶 (3): 1775년에 소설, 『몰락한 농부』가 단숨에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가난은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문학적 성공으로 인하여 유명 살롱의 상류층과 교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784년에 레티프는 그리모 들라 레니에를 중심으로 모인 상류층의 퇴폐적인 서클에 가담하게 됩니다. 1789년 드디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합니다. 그는 혁명가들에게 합류하여 일련의 정치적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이를테면 「서모그래피 Le Thermographe」(1789)를 읽어보면, 우리는 파리의 평민들이 생계문제로 민주주의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혁명의 시기에 레티프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합니다. 1790년 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작은 인쇄소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와중에서 그의 재산은 모조리 빼앗기게 됩니다. 친구인 메르시에가 그를 도와주었으나, 파리에서 새로운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레티프는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 힘들게 살아갑니다. 1806년 다시 앙시앵레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비참한 환경 속에서 유명을 달리합니다. 레티프는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사회적 질서에 대한 갈망을 오로지 문학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이를테면 우주선 , 핵에너지, 전체주의, 유럽의 통합 국가,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공산주의를 예견한 사람이 바로 레티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