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억척어멈 (2)

필자 (匹子) 2018. 10. 19. 10:13

4. 억척어멈의 자식들

친애하는 N, 이번에는 억척어멈의 자식들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들 아일립은 몹시 용맹한 인물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전쟁 시에 그는 잔악하게 행동함으로써 영웅으로 부상하지만, 평화기에는 자신의 잔혹함으로 인하여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아일립이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도덕적인 관점이 아니라,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 행동하라.”는 강령이었습니다. 아일립은 어머니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습니다. 가령 아일립은 “여자와 군인에 관한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에는 젊은 군인의 낙관적 자세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경고를 해도 군인은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며, 어떠한 차가운 물 그리고 고랑이라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진군해 나갑니다. 물과 고랑은 전쟁 속의 위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젊은 군인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으며 무장해 있으며, 언제나 낙관적 태도를 취합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억척어멈은 어떤 경고의 노래로 대응합니다. 이 노래는 아일립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장면과 그의 수치스러운 최후 사이의 대목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노래는 두 연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연에서는 아일립의 상승하는 삶이, 두 번째 연에서는 그의 하강하는 삶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브레히트가 말하려는 것은 자명합니다.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리를 구가하게 하지 않으며, 군인은 결국 마치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 말입니다. 문제는 억척어멈이 이 모든 것을 접하면서도 전쟁의 본질에 대해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아들 슈바이처카스는 고분고분한 인간형의 전형입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순응하는 방식만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금고 하나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습니다. 근본적으로 권력자들이 금고를 차지하기 위해 치르는 게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금고를 팽개치고 달아났으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고분고분하게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융통성 없는 고분고분함 때문에 슈바이처카스는 결국 처형당하고 맙니다. 뇌물을 써서라도 둘째 아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억척어멈은 너무 오래 흥정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카트린은 억척어멈의 말 못하는 딸로서 고통당하는 피조물입니다. 비록 성폭력 당하고 부상당했지만, 저항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카트린은 오래 전부터 순응의 법칙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그미의 행동은 과히 혁명적입니다. 따라서 카트린은 억척어멈과 정반대되는 인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미는 전쟁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카트린은 비록 목숨을 잃지만, 전쟁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의 자세를 실천하는 인물입니다. 이로써 그미는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를 철폐함으로써 전쟁을 철폐하게 할 수 있다.”라는 브레히트의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변화시키게 되면,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결국 전쟁을 종식시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5. 그 밖의 등장인물

요리사는 자의식이 강한 남자입니다. 그는 모험을 즐기며, 여성과의 사랑을 즐기는 바람둥이이기도 합니다. 그는 오래 전에 이베트 포트에의 몸을 탐하여 그미를 거리의 창녀로 내몸 장본인입니다. 그의 말솜씨는 탁월하며, 상황 파악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지요. 솔로몬의 노래는 마치 그를 풍자하는 듯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모든 미덕은 이 세상에서는 위험하지요. 지혜, 대담함, 공손한 태도, 이타주의 그리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아무 것도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아요. 오로지 사악한 것들만이 이득이 되는 걸요. 세상은 그렇답니다.” 요리사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위트레흐트 (Utrecht)에서 어머니의 술집을 인수받습니다. 요리사는 연인, 억척어멈과 함께 함께 그곳에 가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즉 성폭력 당한 뒤에 심하게 부상당한 벙어리 카트린을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요리사는 억척어멈보다 더 악랄하게 경제적 이득에 집착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등장인물 군목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군목은 어느 날 억척어멈과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 그는 성직자의 옷을 벗고, 노예로 살아갑니다. 겉으로 그는 신앙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신앙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따라서 그의 내면은 뒤틀려 있고, 모순에 가득 차 있지만, 작품 속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비칩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군목은 농부들이 부상당했을 때 이들을 간호하는 카트린을 도와줍니다.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는 억척어멈이 시키는대로 행동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미의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입에게서 전쟁에 대한 쓰라린 유머가 터져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그는 억척어멈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억척어멈과 요리사에게 냉소를 터뜨립니다.

 

주변 인물, 이베트 작품에서 모두 세 차례, 자세히 말하자면 제 3장면에 두 번, 제 8장면에 한 번 등장합니다. 관객은 삶과 특성을 고려할 때 제각기 이질적인 이베트의 모습을 접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전쟁의 상황은 이베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베트는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사업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억척어멈과 유사하지만, 그미에게는 인간적 따뜻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에서 이베트는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몸을 팝니다. 그미는 변화된 전시 상황에서 최상의 이득을 누리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베트는 슈바이처카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를 구조하기 위해서 수레를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억척어멈은 자신의 수레를 팔지 않고 그저 저당을 잡힙니다. 불행에 처한 젊은이를 구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이베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카스가 처형당한 다음에 이베트는 억척어멈과 그미의 딸의 안녕에 신경을 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베트에게 중요시하는 것은 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 따뜻함입니다.

 

이베트는 여덟 번째 장면에서 높은 사람의 과부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전쟁 동안에 경력을 쌓아서 부자가 되어, 자신의 친구들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그미는 요리사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접하게 됩니다. 이베트가 어떻게 해서 거리의 창녀가 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말입니다. 그미가 소녀였을 때 요리사는 그미를 유혹하여 그미의 성을 유린하였습니다. 그미는 요리사를 사랑했지만, 요리사는 나중에 그미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이베트로서는 생계를 위하여 몸을 파는 일 외에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 이베트는 요리사를 마음껏 조롱합니다. 이베트는 내면의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는 여성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전쟁의 고통이 그미를 성숙시켰다고나 할까요. 이베트는 비록 과거에 창녀로 살았지만, 이제 자의식을 지닌 숙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베트는 차제에 극작가 뒤렌마트에게 노부인의 방문의 집필 모티프를 제공했는지 모릅니다.

 

6. 억척어멈은 무엇을 배우는가?

 

언젠가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9살 때 아우구스부르크 김나지움 학생이었는데, 나의 선생님들의 근본적 입장을 도저히 바꿀 수 없었습니다.” 브레히트의 놀라운 발언에 의하면 선생들은 브레히트에게 지식과 거짓된 관습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강요한 셈입니다. 선생님들의 귀는 꽉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브레히트는 “교사도 교육 받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브레히트는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사태를 제대로 간파하게 하고, 그들에게 정반대의 견해를 전달하며, 결국 그들의 입장을 변화시키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억척어멈에게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술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브레히트에게 예술 창작의 기본적 전제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믿었습니다. 만약 문학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면, 결국 그것은 사회적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자, 브레히트가 하필이면 교훈시 내지 학습극의 장르를 가장 중요하게 간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친애하는 N, 브레히트에게 배움이란 어떤 새로운 더 나은 질서를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 단계나 다름이 없습니다. 변함없이 현재 상태로 머무는 인간, 어떠한 의지도 지니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발전도 없습니다. 이는 「K씨의 이야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만난 어떤 남자가 K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이때 K씨는 “오”하고 대답했는데,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친애하는 N, 극중 현실에서 억척어멈은 무엇을 배웁니까? 그미가 배우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고로 배움이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억척어멈의 행동은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미는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미의 이러한 믿음은 자식들이 죽은 뒤에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억척어멈은 자식들의 죽음에 혹시 자신이 책임이 있을까? 하고 의심해야 마땅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도 그미는 첫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일립을 만날 수 있는 기대감에 사로잡힌 채 수레를 계속 끕니다.

 

연극을 관람한 수많은 사람들은 극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때 브레히트는 1949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등장인물로 하여금 반드시 무언가를 깨닫도록 조처해야 할 의무는 극작가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결국 “재물을 차지하기 위한 모든 전쟁은 인간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라는 전언을 깨달아야 할 사람은 억척어멈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