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는 야콥 미햐엘 라인홀트 렌츠 (J. M. R. Lenz, 1751 - 1791)의 「가정교사 Der Hofmeister」 (1774)를 개작하였습니다. 렌츠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며, 브레히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룹니다. 가난한 부목사의 아들, 로이퍼는 가정교사로 일합니다. 그는 추밀원 고문관의 동생이 되는 베르크의 집에서 아들 프리츠 그리고 딸 구스첸을 가르칩니다. 로이퍼는 맛있는 음식을 얻지만, 적은 월급을 받으며, 때로는 무척 모욕당하기도 합니다. 이때 그는 구스첸을 유혹합니다. 구스첸 역시 이를 마다하지 않고, 육체적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계급 차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정상적인 연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구스첸은 미성년이기도 합니다. 구스첸이 임신하게 되자, 결국 주인공은 마을의 선생인 벤체스라우스의 집에서 숨어 지냅니다. 그러나 결국 베르크 집안의 사람들에 의해서 발각되어 주인공은 심하게 두들겨 맞습니다. 로이퍼는 벤체스라우스가 데리고 있는 조용한 처녀, 리제에 반하지만, 행여나 다시 “몹쓸 짓”을 저지를까봐, 면도날을 꺼내어 자신의 생식기를 거세합니다. 결국 로이퍼는 리제와 결혼하게 되고, 구스첸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로이퍼와의 관계를 청산합니다. 이로써 극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브레히트는 렌츠의 작품의 주된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작품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온존합니다. 렌츠는 (두 작품에서 한결같이) 주인공을 (당시 지식인의 상징하는 인물로서) 체제에 순응하는 나약한 존재로 그렸습니다. 물론 주인공 로이퍼는 권력과 금력에 복종하고 아첨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는 시대의 조류 내지 관습에 기인하는 것일 뿐, 로이퍼의 인성에 하자 때문에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주인공 로이퍼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렌츠는 주인공 로이퍼를 통하여 한편으로는 교육의 자유화를 강조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교사의 굴욕적인 삶을 풍자하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초 독일에서는 실러, 헤겔, 횔덜린 등과 같은 지식인들이 가정교사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브레히트는 렌츠의 작품을 개작하게 되었을까요? 주인공 로이퍼는 가정교사로서 귀족의 집의 자제들을 가르칩니다. 이들은 가정교사들을 통하여 나중에 권력자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지식과 능력을 배양하게 됩니다. 사건은 귀족이 아닌 가정교사가 귀족의 자녀와 애정 관계를 맺었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구스첸이 임신하게 되자, 로이퍼는 그미와 함께 살거나 결혼하기는커녕, 주위의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 거세하고 맙니다. 이는 그야말로 상징적입니다. 지식인으로서 계급 차이 내지 계층 사회라는 주어진 불합리한 현실적 조건을 개선하지 못하고, 기득권 세력의 요청에 의해서 자신을 징벌한다는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주인공의 아첨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브레히트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지식인들의 아첨입니다. 지식인의 아첨은 독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브레히트에 의하면 결국 프로이센의 계층적인 권력 구조 내지는 궁극적으로 파시즘을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브레히트는 로이퍼라는 인물 속에서 지식인 계급의 권력과의 결탁, 굴종, 정신적 거세 등을 예리하게 투시합니다. 나아가 귀족들의 딜레탕트 식의 예술 취향을 은근히 풍자합니다. 이를테면 추밀원 고문관의 부인은 음악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치의 살인마 하이드리히 Heidrich 역시 모차르트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두 작품의 인물 역시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추밀원 고문관 폰 베르크 (구스첸의 삼촌)는 렌츠의 경우 자유주의의 세계관을 지닌, 비교적 건전한 귀족으로 등장합니다. 예컨대 그는 사교육의 폐단을 지적하고 공교육을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지요. 이에 반해 브레히트는 추밀원 고문관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추밀원 고문관은 브레히트의 작품에 의하면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오로지 자신의 가족과 명예만 고려할 뿐입니다.
둘째, 작가들은 주변 인물인 학교 교사, 벤체스라우스를 다루는 데에서도 의견을 달리합니다. 렌츠는 그를 교사직에 긍지를 느끼는 철저하고도 사명감 넘치는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브레히트는 그를 정신적으로 거세당한 인물로 다루고 있습니다. 벤체스라우스가 금욕과 절제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는 그에게 오로지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는 자신의 욕정을 홍등가에서 해소하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게다가 벤체스라우스는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지극히 편협한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벤체스라우스는 로이퍼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는 권력자에게 허리를 굽히고, 아랫사람을 호령하는, 사도마조히즘의 속물입니다.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벤체스라우스는 정신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보여주지 않는 거세된 자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거세되어 있습니다.
셋째, 작가들은 주변 인물 페투스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도 의견을 달리합니다. 페투스는 추밀원 고문관의 아들인 프리츠의 친구입니다. 렌츠의 작품에서 페투스는 외향적인 학생으로서 프리츠의 인성 발달에 도움을 주는, 무척 저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입니다. 그는 여학생 레하르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성 관계를 맺습니다. 나중에 레하르의 부모를 찾아가서 결혼을 요청합니다. 방법이 졸렬하지만, 페투스는 레하르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페투스를 이와 정 반대로 묘사합니다. 열렬한 칸트주의자인 그는 전쟁 옹호자인 볼프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시험 답안지에 칸트의 『영구 평화론 Zum ewigen Frieden』을 기술합니다. 그리하여 페투스는 네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십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해서든 졸업하기 위하여 자신의 견해와는 반대되는 전쟁 옹호론을 피력함으로써 학점을 취득한다는 사실입니다. 페투스는 졸업 후에 자신이 사랑하는 카롤리네와 결혼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브레히트의 작품에서는 페투스가 레하르와 애정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다. 레하르를 임신시킨 자는 페투스가 아니라, 그의 친구 볼베르크입니다.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페투스는 그저 그미의 낙태 비용을 조달해 줄 뿐입니다.
특히 브레히트의 칸트에 대한 비판은 페투스라는 인물을 통하여 무척 첨예하게 드러납니다. 페투스는 소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지조를 꺾고, 자신의 견해와는 반대되는 내용으로 학점을 취득합니다. 특히 칸트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은 칸트의 결혼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결혼이 칸트의 말대로 “두 남녀가 살아있는 동안에 서로의 생식기관을 사용하기 위한 결합”에 불과한 것일까요? 주인공 로이퍼의 자기 거세, 칸트의 금욕주의 등은 체제 옹호적 자세와 결코 무관한 게 아닙니다. 권력 그리고 기득권은 한편으로는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성생활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차단시킵니다. 일부일처제, 결혼 등의 관습과 도덕은 브레히트에 의하면 국가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일반 사람들의 사생활을 억누르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일반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금욕하면서, 경제생활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렌츠의 로이퍼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브레히트의 로이퍼는 관객에 의해서 비판당해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로이퍼와 같은 지식인이라면, 이러한 비밀 그리고 그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으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거세하고 맙니다. 물론 그가 계급 사회에서 결혼을 통하여 귀족으로 부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계급을 초월한 사랑과 염문이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가 무조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위에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을 거세시킵니다.
이로 인해 독일에는 전체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고 명령하는 자와 명령 받는 자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로이퍼의 거세 행위는 지식인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비판적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은 독일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어떠한 비판적 발언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결국에 이르면 히틀러의 독재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이야 말로 20세기 독일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랑이라고 브레히트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50년대 파시즘의 폭력이 사라진 다음에 그가 현실적 문제를 멀리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민주의의 삶을 비판적으로 투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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