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이삭 바벨의 부조니의 기마대

필자 (匹子) 2021. 10. 6. 10:01

친애하는 J,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는 당대에 대체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이 현재에 주어진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창조에 몰두하는 이유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려는 거대한 의지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지가 미래에 그들의 명성을 드높이게 해줍니다. 언젠가 천재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 1813 - 1837)는 1834년 3월 자신의 신부 (新婦)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을의 시간을 상실한 생명들입니다. 그렇기에 겨울이 지나서야 비로소 씨를 여물게 할 수 있어요. (Wir sind wie die Herbstzeitlose, welche erst nach dem Winter Samen trägt.)”

 

뷔히너의 이 말은 역설적이면서도 위대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창조를 통한 결실이라는 지고의 이득을 당대에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사라집니다. 불세출의 화가 고흐를 생각해 보세요. 고흐는 찢어진 가난 속에서 창작에 임하다가, 극도의 우울과 자학으로 인하여 자신의 귀를 잘랐습니다. 친애하는 J, 고흐의 경우는 자신과 작품 그리고 세계에 관한 관계, 즉 내면적 갈등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작품 하나가 예술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이삭 엠마닐로비치 바벨 (Isaak E. Babel, 1894 - 1940)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의 소설집, 『부조니의 기마대 (Konarmija)』는 소련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결국 작가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타부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당국에 시달렸습니다.

 

처음에 단편집은 책으로 간행되기는커녕 잡지에 발표될 수조차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잡지의 편집자는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게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바벨의 원고는 잡지사를 전전하다가 결국 친구인 막심 고리키 (M. Gorki)의 도움으로 1916년에 잡지 『레토피』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뒤늦게 이삭 바벨의 작품과 그 내용을 접하게 되고, 작품을 반정부적이고 체제 파괴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치 70년대에 한국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리영희 교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가 젊은이들에게 널리 퍼진 다음에 판금조치를 당했듯이, 고리키의 잡지가 모조리 당국에 의해서 수거될 때, 바벨의 소설은 이미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고 이디시어 등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삭 바벨의 모습. 그는 필화 사건으로 인하여 시베리아에서 비명횡사하였다.

 

소련은 작가에게 서서히 박해를 가합니다. 그 이유는 은폐되어야 할 유대인 탄압의 끔찍한 장면을 이삭 바벨이라는 작가가 낱낱이 묘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은 1939년 5월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서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하여 거짓 죄를 낱낱이 고백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삭 바벨은 1940년 약식 재판을 거친 다음에 “반역죄”로 1월 27일 부티르카 형무소에서 총살당했습니다.

 

그 후에 소련 비밀경찰은 바벨의 미발표 원고 그리고 일기 편지들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버렸습니다. 당국은 그의 시체를 시베리아로 보내어 어딘가에 파묻어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그의 사망 일자와 사망 장소는 서류상으로는 “1941년 5월 시베리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내 안토니아 니콜라예브나는 남편이 죽은 지 15년 후에 비로소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의 소설집이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삭 바벨의 비극적 최후 그리고 위대한 문학성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바벨의 소설집 『부조니의 기마대 (Konarmija)』는 192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바벨은 1894년 오데사에서 유대인의 상인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에 적군에 가담하여 부조니의 기마대와 함께 군인으로서 소련 내전에 참가했고, 그 후에 고향 오데사에서 인쇄업에 종사했습니다.

 

1923년 마야코프스키 (Majakovskij)는 “LEF”라는 잡지를 간행했는데, 바벨은 자신의 작품들을 바로 그 잡지에 게재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바벨의 소설들은 1927년에 “오데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간행되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은 지역 문학에 해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가 바벨은 이를테면 카뮈 (Camus), 함순 (Hamsun), 비토리니 (Vittorini)와 같은 향토 작가의 반열에 오를만 합니다.

 

이삭 바벨은 작품집에서 부조니의 기마대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한마디로 부조니의 기마대를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작품은 마치 모파상의 단편 소설이 보여주는 압축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부조니 기마대가 저지른 잔악한 살육행위를 사실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령 크리스케파라는 군인은 코사크 인으로서 부조니의 부하였는데, 자신의 고향 마을을 덮쳐서, 친부모를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어느 오두막에서 그는 부모를 칼로 베어버리고, 그들의 유품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게다가 우물가에 개를 죽여서 매달아놓았고, 성유 물들을 오물로 더럽혀 놓았다.”

 

어느 코사크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총알 하나로 너는 인간의 영혼이 머문 곳으로 파고들 수는 없어. 자넨 인간 영혼이 어떠한지 도저히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렇지만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아. 적에게 총을 갈긴 다음에 그 놈의 사악한 영혼이 과연 어떻게 보이는지 마구 헤집곤 하거든. 히히” 소설의 자아는 유대인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코사크 기마대에 속하는 군인입니다. 그는 부조니 기마대가 이른바 혁명의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가? 하는 점을 슬프고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벨의 소설은 기마병의 존재가 얼마나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로 잔악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조니 기마대는 어느 유대인 마을을 덮쳐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모든 생명체를 살육해버립니다. 바벨은 임신한 여자들이 어떻게 도살당하는지, 비둘기들이 어떻게 도살당하는지, 말 (馬)들의 다리가 어떻게 절단되는지 세밀하게 기술합니다. 죽어가는 짐승들, 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무고한 유대인들이 소설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벨은 장면 장면을 건너뛰면서, 잔악한 사건들을 아주 무덤덤한 필치로 서술해 나갑니다. 독일의 평론가 발터 옌스 (Walter Jens)가 바벨을 카프카를 방불케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닙니다. 바벨이 서술하는 자연의 서정적 아름다움은 그 자체 끔찍한 사건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의 비유는 아름답고도 놀라울 정도로 기괴하다는 점에서 독일의 표현주의 문학과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1924년 부조니는 잡지 『10월』에 글을 발표하여, 이삭 바벨의 소설 속의 사건은 거짓이며, 실제로 폴란드에 있었던 사건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훗날 신빙성을 잃었습니다. 역사는 소설 속의 내용을 진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벨은 참혹하게 총살당했지만, 진실을 전하는 그의 문학 작품은 남아 있습니다. 부조니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 사건들은 바벨의 작품으로 인하여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