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박설호: (1) 갈망의 무게, 혹은 성취의 우울

필자 (匹子) 2025. 6. 11. 10:18

다음의 원고는 창작 21, 2025년 봄호 (통권 68호 200 - 220쪽)에 실린 것입니다. 논문 가운데 일부 내용은 이미 블로그에 올린 바 있으므로 중복됩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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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다.

 

알파: 반갑습니다. 오늘은 희망에 관한 세 편의 시를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평소에 느끼겠지만,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함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할 수 있으니까요.

베타: 동의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자신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 (1959)에서 갈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형을 추적한 바 있지요? (각주: Ernst Bloch: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 M. 1985, (한국어판)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5권, 열린책들 2004.).

 

델타: 흔히 사람들은 인간의 도덕적 자세가 자신의 행동을 관장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인간의 행동은 심리적 본능에 의해서 비롯한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알파: 좋은 지적이로군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력 그리고 공명정대한 이성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순간적 충동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아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적 논거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충동 내지는 꿈을 세부적으로 논하려고 합니다. 그는 꿈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밤에 꾸는 꿈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낮에 꾸는 꿈을 가리킵니다. 전자가 “밤꿈”이라면, 후자는 “낮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낮꿈은 백일몽(白日夢)과 같은 유형입니다. 우리는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서 무심결에 스스로 갈구하는 바를 뇌리에 떠올리곤 하지요.

 

감마: 젊은이라면 누구나 낮꿈을 꾸겠지요? 밤에 꾸는 꿈은 주로 심리적이고 성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지지만, 낮에 꾸는 꿈은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성취되지 않은 욕구를 담고 있겠네요?

알파: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1900)에서 밤에 꾸는 꿈이 무엇보다도 성욕, 즉 리비도에 근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밤꿈에 비하면 낮에 꾸는 꿈은 굶주림을 해결하려는 충동에서 출발합니다.

 

델타: 그렇다면 주어진 현실의 경제적 조건이 문제이겠네요?

알파: 바로 그점이 중요해요. 낮꿈 속에는 “어째서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식욕의 충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신분석학자들은 식욕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굶주림에 관한 문제를 도외시했지요. 그들은 각자 인간의 심리적 충동에 관해서 연구했습니다. 이를테면 알프레트 아들러는 인간이 내면에 자리하는 권력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치 콩팥 하나가 없으면, 남은 한 개의 장기는 두 배의 능력을 발휘하듯이, 인간의 충동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생력을 지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각주: Alfred Adler: Praxis und Theorie der Individualpsychologie: Vorträge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therapie für Ärzte, Psychologen und Lehrer, Köln 2012, S. 76.).

 

프로이트는 주지하다시피 처음에는 성 충동, 즉 리비도 이론을 추구했지요.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성적 욕망이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말년에 죽음 충동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 Jung은 권력 충동을 추구했습니다. 융에게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질병을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의 내면에 도사린 집단적 무의식 내지는 원형을 찾는 과업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그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각주: 블로흐는 카를 구스타프 융을 피와 “토양을 중시하는 반동적 파시스트”라고 비판하였다.).

 

베타: 그렇군요. 그렇지만 블로흐의 입장은 그들과는 어떻게 다르지요?

알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가장 절실하게 해결해야 하는 충동은 굶주림을 떨치고 싶은 욕망입니다. 생존 충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배고파 죽겠다.”라는 하소연만큼 절실한 고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일주일 이상 굶주리면, 인간은 목숨을 잃으니까요. 이에 비하면 프로이트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던 의사들은 병원의 문 앞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여놓았습니다. “개와 거지는 출입을 금함.” 우습지 않습니까?

 

감마: 블로흐는 인간의 세 가지 욕망 (식욕, 성욕, 명예욕) 가운데 식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셈이로군요.

알파: 그렇습니다. 블로흐는 인간의 위(胃)를 “가장 긴급하게 채워 넣어야 하는 첫 번째 램프”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블로흐는 이때 느끼는 감정을 “성취의 우울” 내지는 “실현의 아포리아”라고 언급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이 그림은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 - 1840)의 "우울"이다. 방랑하는 두 남녀는 자신의 세계가 갇혀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