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5. 텍스트의 제 3부
“하이네 상처는 흉터가 생기기 시작한다, 비스듬하게. 이에 비하
면 보이체크는 개방된 상처이다. 보이체크는 개가 묻혀 있는 곳
에 살고 있다. 개는 보이체크라고 불린다.”
본문에서 “비스듬하게”라는 단어는 추상적으로는 “잘못된 채”, 내지는 “미결로 남은 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이체크를 둘러싼 개인적 사회적 문제는 오늘날까지 미결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그의 상처는 “개방된” 채 터져 있다. 유대인 출신의 망명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1797 - 1856)는 프로이센의 전근대적인 문화 풍토에 저항하다가 인생의 후반기를 프랑스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사회 비판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계급 갈등의 문제와는 거리감을 취했다. 가령 하이네의 4행 연작시, 아타 트롤 (Atta Troll)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천박함을 증오하는 작가의 입장이 전편에 깔려 있다. 이에 비하면 뷔히너의 「보이체크」는 궁극적으로 계급 갈등으로 인한 정신 이상 및 살인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그’의 부활을 기다린다. 개가 늑대로 회귀하려는 데 대
해 두려움 그리고 (혹은?) 희망을 지닌 채.”
당하고 사는 자의 고통은 언젠가는 저항으로 탈바꿈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보이체크는 반드시 노여워하는 “거인”으로 회귀하고 말리라는 게 뮐러의 지론이다. 왜 우리는 “개가 늑대로 회귀하는 데에 대해” 희망을 품고, (혹은)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당하고 살던 자의 저항은 뮐러의 표현에 의하면 목표에 있어서는 바람직하나, 과정에 있어서는 폭력을 동반한다. 이는 하나의 유형적 모순 내지는 갈등으로서, 뮐러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바 있다.
“늑대는 남쪽에서 온다. 태양이 하늘의 정점에 위치하면, ‘그’는
우리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백열 (白熱)의 시간 속에서 역사를
진척시킨다.”
본문에서 “백열의 시간”은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지금 시간 Jetztzeit”이라고 명명한 바 있듯이- 어떤 거대한 혁명 운동으로 응축되어 폭발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우리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이너 뮐러는 저항하는 흑인 시인 내지는 만델라 등과 공감대를 원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뮐러는 「보이체크 상처」에 관한 토론에서 “나는 니그로입니다.” 하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발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이 담겨 있다. 첫째, 뮐러는 유럽의 전투적 문화적 침략에 대해 보복하는 제 3세계의 혁명 운동에 동조한다. 왜냐하면 제 3세계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유럽인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뮐러는 현대 문명이 은폐시킨 본능과 감성에 근거하는 활력주의에 대해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 뮐러에 의하면 “향유와 성 (性)에 대해 더 이상 제한을 가하지 않는 태도야 말로 어떤 보다 인간적인 문화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
“역사적 사건이 진행되기 전에 한에서는 엔트로피의 서리 속에서
공동의 멸망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혹은 핵 실험의 번
개불 속에서 정치적으로 앞당겨질지도.”
“엔트로피 εντροπή”란 명실 공히 열역학 공식이다. 그리스의 어원에 의하면 그것은 “전환” 내지는 “전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서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과학 기술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파생될 수 있는 심각한 현실 상황일까? 그게 아니라면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회의주의적 사고가 사회적으로 만연한 현상일까? 우리는 여기서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을 유보하기로 한다. 뮐러의 발언에 의하면 과학 기술의 파국이 도래하기 전에 최소한 우리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변화를 이룩해야 한다.
“핵번개는 유토피아들의 종말이며, 인간을 벗어난 저편에서 또다
른 현실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뮐러는 유토피아를 의도적으로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유토피아의 사고는 그 자체 반박될 수 없으며, 크든 작든 간에 주어진 현실에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반유토피아의 사고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뮐러의 견해에 의하면 유토피아의 종말의 가능성은 역사 발전 자체에서 그리고 다른 요소, 즉 과학 기술의 비대한 발전 및 이에 대한 맹신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뮐러는 「보이체크의 상처」에서 유토피아는 물론이요, 유토피아의 사고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일까? 주어진 현실에 대한 묘사의 차원은 작가의 입장의 차원과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뮐러의 발언은 하나의 입장 표명이 아니라, 참담한 현실 묘사로 이해될 수 있다.
6. 나오는 말
마지막으로 「보이체크 상처」를 요약해 보자. 제 1부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배제된 혁명, 눈멀고 잔인한 행동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적 상황 등이 묘사된 반면, 제 2부에서는 핍박당하고 외면당하는 작가들의 숙명이 요약되어 있다. 문제는 제 3부, 미래 현실에 대한 작가의 환영이다. “텅 빈 유토피아의 공간”, 그렇다면 뮐러는 동독 및 유럽 사회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고찰하고 있는가?
일단 우리는 「보이체크 상처」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구동독에도 조금씩 영향을 끼치던 시기에 씌어졌음을 고려해야 한다. 1987년의 입장을 예외로 간주한다면, 뮐러는 초지일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였다. 즉 자신은 소련의 개혁 정책을 반기지만, 구동독은 이러한 정책의 결실을 충분히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개방은 개혁을 촉진시키지 않고, 이와는 반대로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1985년 뮐러의 이러한 부정적인 예언은 몇년 후 독일의 과녁에 그대로 적중하게 된다.
90년대에 들어서서 뮐러는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거의 몰락한 요즈음 유토피아의 개념을 달리 정의 내려야 한다고 토로하였다. “지금 어떤 텅빈 공간이 있어요 (..) 과거에 제 1세계와 제 3세계 사이에는 제 2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알리바이로서 그리고 속죄양으로서 말이지요. 이제 우리 (북미인 그리고 유럽인들 - 역주)는 직접 제 3세계와 부딪치고 있어요 (..) 베를린 장벽의 붕괴 즉시 걸프 전쟁이 발발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 악의 제국은 붕괴했습니다만, 이제 악은 하나의 비루스로 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땅을 지니지 못하게 된 공산주의 역시 비루스로 변해버렸지요. 이제 주어진 것이라곤 텅 빈 공간이요, 이한 허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전에는 소련이 속죄양으로서 존재했으므로, 잘사는 나라의 못사는 나라에 대한 착취는 거의 외면당했다. 또한 악의 붉은 제국이 있었기 때문에 서방 세계의 잘못은 알리바이로 묵인되곤 하였다. 이제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기존 사회주의적 국가로 이루어졌던 제 2세계는 사라졌다. 물론 세상에는 유토피아적 설계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의외의 변수들이 자주 속출하기도 한다. 가령 19세기 중엽부터 계급 문제가 시대적 변화 및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면, 20세기 말부터 인종, 식량과 에너지 고갈 그리고 자연 파괴 등의 제반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들이 어찌 (세계적으로 확장된) 계급 갈등의 속죄양으로 혹은 알리바이로 작용하겠는가? 오히려 제 2세계가 사라진 지금, 늑대는 남쪽에서 오게 되리라. 문제는 문명인들과 원주민들과의 충돌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재화를 강탈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소유한 재화의 가치는 조만간 절반으로 하락할 것이다. 양치는 백인들이 몇 번 거짓말을 하면, 늑대는 마침내 잔등에 붉은 비루스 균을 잔뜩 업고 그들에게 돌진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뮐러는 말한다, 빈부 사이의 혁명적 대립이 존재하는 한, 어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은 존속되리라고.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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